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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길 조경희 May 12. 2023

5. 삶과 죽음 사이

다른 아이

5. 삶과 죽음 사이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삶은 현실이고 죽음은 미래입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삶 너머의 세상으로 가거나 질병으로 혹은 연로해서 내 곁을 떠나갔을 때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방황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나하고 싶은 공부를 돈이 없어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오직 돈을 벌어 잘 살아보겠다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또순이로 악착같이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병약하게 태어나 잔병을 달고 살았던 저를 잘 아는 형제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제 고집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향해 돈을 ‘구워 먹을래 삶아 먹을래?’라고 돈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저의 가슴속 응어리를 녹여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서른다섯의 여름,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그날의 느낌이 이상하고 냄새가 역해서 모자보건소를 찾아 자궁암 검사를 했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와서 조직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저는 지금 바쁘니까 시간이 나면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감을 잡지 못한 거죠. 수화기 끝의 간호사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검사 결과가 안 좋으니까 빨리 큰 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를 하시라고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그때야 상황을 인지하고 모자보건소에 들려 결과지를 받아 안성의료원으로 갔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은 8월 장마로 마치 앞으로 저에게 닥칠 어려움을 예고라도 하는 듯 장대비가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게 내렸습니다. 결과는 악성이고 빨리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뇌는 기능을 상실하고 손발을 마비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 어떻게 해요. 아는 곳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저 어떻게 해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며 보채는 저를 바라보던 의사 선생님은 편지를 써주며 서울대학 병원 이**교수님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큰 아이가 열 살, 작은 아이가 네 살로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인데 제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이 엄마 없이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서울대학 병원에 가서 진료 예약을 하고 돌아오면서 교통사고로 아무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준비할 시간은 있다는 생각에 셀프 위로를 하며 수술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김치도 넉넉히 담가 놓고, 큰 아이 담임 선생님께도 알려 혹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고 말씀드리고 도시락 싸들고 운동회에도 갔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항암치료는 없었으며 5년 동안 재발하지 않으면 수명대로 살 수 있지만 3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하여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운동하지 않으면 장이 유착되어 다시 수술해야 한다고 등 떠미는 간호사에 의해 반 강제로 병원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 볼을 스치는 바람이 어찌나 부드럽고 달콤하던지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이 너무나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병원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줄지어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이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느라 이런 달콤한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날마다 지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연애편지를 쓰듯 엽서에 써서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산다면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를 키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7년째 되던 해 병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수양부모 협회의 박영숙 회장님이 여성시대에 나와 수양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저는 수양부모가 되기로 결심하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교육을 받고 여섯 살 여자아이를 위탁해 키우기 시작한 것이 제가 DNA가 다른 아이들과의 동거가 시작된 시점입니다.      


저는 여전히 삶과 죽음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출발점은 아득히 멀어졌고 도착지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삶에 집착하여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하듯 여행을 즐기고 취미생활로 시간을 채워 넣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고픈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고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합니다. 


오늘도 시계의 초침은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저는 삶과 죽음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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