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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강 작가의 독일삶
Sep 27. 2021
독일사회에서 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전형적인 포커 페이스 독일인들
독일 양로원에서 막 일을 시작했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다 보니 언어적 한계도 있고, 업무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식사를 돕고 휠체어에 옮기는 일은 단순한 일이라 하지만 힘을 요했다.
처음엔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독일 양로원에서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 3교대로 근무하고, 6시간 근무까지는 30분 동안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8시간 이상 근무자는 1시간이 주어진다. 나의 경우 하루 6시간 근무체계였다. 30분 쉬는 시간에도 어르신 방에서 알람이 울릴 때면 1분도 안 되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의 필요가 급하면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독일 동료들은 달랐다. 알람이 울려도 서두르지 않았고, ‘으레 그 노인은 그런다’는 식으로 대했다. 내가 주로 달려가자 나중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근무실에서 수다를 떨면서도 방에서 울리는 알람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초보인 나만 마음이 급해 뛰어가기 일쑤였다.
난 점점 지쳐갔다. 게다가 하루 동안 내가 맡은 어르신이 정해져 있는데 다른 동료들이 이따금 도움을 청하곤 했다. 그들 자신들은 틈만 나면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잔뜩 여유를 피우면서도 맡은 일을 제 시간에 끝내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맡은 업무를 겨우 다 마쳤는데, 한 동료가 나에게 자신의 환자 몸을 닦아달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아직 완수하지 못한 어르신을 대신 해달라는 것. 그 어르신은 침대에 줄곧 누워있는 중증환자였고, 몸무게는 100킬로가 넘었다. 욕창 방지를 위해 몸의 위치를 2시간 마다 바꿔줘야 했는데 나로서는 엄청난 힘을 필요로 했다. 그분은 침대에만 누워 있어 근육이 소실되어 흐늘해진 살을 주워담다시피 해서 모아모아 옆으로 눕혀야 한다. 그런 어르신을 감당하고 나면 허리부터 무리가 온다. 물론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어느 정도 기술적인 측면도 필요하지만, 나와 몸무게가 현격히 차이 난 어르신은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처음엔 그런 동료의 요구를 다 받아주었다. 선한 섬김을 실천한다는 다소 위선적인 생각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착한 콤플렉스. 독실한 기독교인 부모님 밑에서 늘 희생과 헌신이 미덕이라는 것을 배운 나머지 손해보는 것에 대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한 나였다. 원수가 왼 빰을 때리면 오른 뺨을 대라는 게 성경적이었다. 최대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온 삶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양로원 생활은, 오른뺨을 대면 오른뺨은 물론 나머지 몸통까지 대주어야 할 판이었다.
양로원 생활을 이어가면서 점점 지쳐갔다.
내가 맡은 일도 더디어졌고 동료의 부탁도 부담스러웠다. 언젠가 동료에게 못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동료의 말은 가관이었다.
“난 네가 이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 너무나 즐겁게 일해서 말이지. 하하.”
내가 어르신들과 함께 할 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분명 비소였다.
이런 염장 엿 사먹는 소리를 하다니! 누가 일을 좋아한단 말인가!
난 그때부터 독일인들을 위한 헌신은 바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우를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들은 내가 그저 시키면 다 하는 바보로 알았던 것이다. 결국 나의 착함을 이용한 꼴밖에 안 된다.
언어적으로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지간한 일이면 Ja(예스)를 연발한다, 나의 경우도 특별히 관계에 스크레치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요구를 들어주고 Ja를 했을 뿐이다.
당시 첫 양로원에는 20년 넘은 동료들이 많았다. 그들은 늙은 토끼(알테 하제)로 텃세를 부리곤 했다.
그들은 업무에 노련했지만 비열했다. 상관들에게는 너스레도 잘 떨었다. 포커페이스에 능한 이들이었다. 즉 상대가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표정관리를 완벽하게 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에 능한 편이다. 속으로는 화가 나더라도 겉으론 웃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는 부류다. 하지만 말이 어눌한 외국인들에 대해 무시하거나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담배를 피우며 노동시간의 많은 부분을 나름의 휴식시간으로 삼았다. 은근한 따돌림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도 여유가 생겼고 말할 수 있는 맷집이 생겼다. 할 수 없는 일에 Nein(노우)를 했고, 불의한 일에는 강하게 화를 냈다. 물론 비록 그들과 사이가 서먹해지긴 했어도 그들이 나를 함부로 하는 것은 사라졌다. 그들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이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직업적 열등감이 많았기에 같은 처지의 외국인들에게라도 무시해서 자신들의 우월성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거다.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독일인들에겐 철저히 일 중심으로 해야겠다는 점이었다.
외국인으로서 무시 당하는 것, 이러한 문제를 계속 겪는 까닭은 경계 없이 착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지속적으로 함부로 대한다면 그 원인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 있을 수 있었다. 나의 경우 거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또한 동료의 마음에 착한 이미지로 남아서 편하게 근무하고 싶은 유약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러자 상대가 더욱 힘을 얻어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남이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려면 초반에 즉시 강경하게 대응하며 정의로운 방식으로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래야 피해자로 전락하지 않고 가해자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약자의 사고방식은 타인의 비위를 맞춰서 공평한 대접을 받으려는 것인데 이러한 기대는 처참히 깨질 때가 많다.
상처받은 사람은 고통을 기억하지만 상처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지나치게 나약하면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그런 이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사회에 살면서 느낀 것은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사는 삶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민자의 삶은 더욱더 거칠고 사납다. 강한 게르만 민족과의 사이에서 버티려면 약간 강하게 보이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