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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글아 로 Oct 22. 2020

부치지 못한 태교 편지 8

2015. 6. 15. -불확실 보다 더 불확실한 상황.

2015년 6월 15일

-불확실 보다 더 불확실한 상황.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임신테스트기를 써보았어. 이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란다.

(앞으로 널 뱃속에 넣고 키우다가 출산하는 것에 비하면 개구리발톱에 때만도 못한 일이지만. )

먼저 아침에 일어나 눈도 다 뜨지 못한 채로 화장실로 가서 종이컵에 첫 소변을 받아야 해.

그리고 종이컵에 테스트기를 담가 놓고 10을 세지.

그리고 그걸 빼서 뚜껑을 닫고 편평한 곳에 올려놓고 5분을 기다려야 해.

기다리는 동안 종이컵의 소변을 다시 변기에 붓고 물을 내리고 손을 깨끗이 씻지.

그다지 깨끗한 일이 아니라서 약간의 결벽증을 가진 이 엄마가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야.

 

사실 소변을 받는 일 보다 힘든 건 결과를 기다리고 확인하는 거야.

처음에 보기엔 한 줄, 즉 비임신이었지.

그런데 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희미한 선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그럼 임신이지.

그런데 이게 참 애매한 게 시간이 좀 많이 지나서 희미한 선이 생긴 것 같아. 그럼 안되거든.

 

결국 임신인지 아닌지 더 불확실한 상태가 된 거지.

처음에 한 줄만 보였을 때는 ‘이상하다? 몸 상태는 정말 임신 같았는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오늘 운동 실컷 할 수 있겠다.

메르스 때문에 임신을 좀 미루기로 했으니 밀크코코아에 올라온 신상 원피스를 사놓고 열심히 다이어트를 해야지.

‘올여름도 핫하게 보내겠어.’라는 생각을 아주 스치듯 하고,

사실 그것보다 진짜 제일 처음으로는 네 아빠의 눈치를 살폈어. 실망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곤 실망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시댁과 친정 식구들이 떠오르고, 태교 편지를 처음 쓴 날 결심했듯이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앞이 답답했어.

무엇보다 형규에게 결핍을 준다는 생각과 불임이 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괴로웠지.

또 내가 혼자 써온 며칠 간의 태교편지는 어떡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만감이 교차했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아기를 가지지 않기로 해도 고통스럽고 힘들 것만 같았어.

 

참 이상하지. 사실 어제만 해도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거든.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고, 그림 교사일을 하고, 운전면허를 따고,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도 해보고, 벽화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전시도 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마구 떠올렸어.

그런데 임신이 아닌 걸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게 귀찮아졌단다.

이상하지. 참 이상해.

 

임신 테스트기에서 한 줄만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양가감정으로 힘들어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만 악몽을 꿨어.

높은 굽을 신고 미끄러운 계단을 지나 화장실로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자들이 바닥에 무엇을 떨어뜨리고 찾질 못해 화장실 칸에서 나오질 않는 거야. 무려 3칸이나 있었는데. 그리고 겨우 내 차례가 되어 볼일을 보려고 가는데 웬 남자 하나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거야. 내가 여긴 여자 화장실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나에게 알고 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이상한 미소를 띠며 나를 스쳐지나 볼일을 보았지. 나는 너무 놀라서 화장실에서 나와 뛰어 올라가며 카페 사람들에게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왔다고 소리쳤어. 그러다 깨어났지. 소름이 돋는 무서운 꿈이었어.

 

그리고 아침을 준비하러 밖에 나와 임신테스트기를 다시 보았는데 희미한 한 줄이 더 생긴 거야.

이게 뭐지? 싶어 좀 검색해보니 희미한 줄이라도 5분 안에 나오면 임신일 확률이 높다고.


난 5분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거든..
그냥 한 1~2분 기다려서 한 줄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한 채 자로 들어가 한 시간이 지난 후 임신테스트기를 보았던 거라, 나중에 나타난 ‘그 희미한 한 줄’이 5분 안에 생긴 건지 아닌지 도통 알 길이 없어.


그래서 결국 지금은 임신인지 아닌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보다 더 불확실한 상태가 되어버렸지.
한 사흘 뒤에나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것이 좋을 테지만, 기다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내 성격 상 내일 아침 첫 소변을 받을 것 같구나.

그럼 불확실한 상태보다 더 불확실한 상태보다 더 불확실한 상태가 되겠지.

 

너에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는 기다리는 걸 제일 싫어해.

지금은 네가 아주 쪼꼬만 세포 상태라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나중에 많이 커서 어린이가 되면 이 말을 꼭 명심해야 해.

“엄마는 기다리는 것을 제일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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