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밖의 아이들 ㅣ2022년 10월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혼자 방에만 있자니 제일 답답한 게 아이들을 못 본다는 거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리니까 더 보고 싶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짧은 대화는 카톡으로 혹은 목소리를 조금 키워서 하고 긴 이야기는 전화로 하는데, 통화 중에 언뜻언뜻 밖에 있는 아이들의 실제 음성이 들린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기분은 뭐지? 애틋함 같기도 설레임 같기도 하다.
그 설레임을 타고 가보니, 아이들 어릴 때 내 손과 품에 쏙 들어오던 그 체온과 보드라운 몸을 늘 감각하며 살던 시절에 도착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본능적이랄까 원초적이랄까 그런 감정으로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애틋했었던 것 같다. 나와 아이들 사이의 몸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던 때니까 그게 당연했을 거다.
사실 나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집에서 자꾸 나가려 하고, 밖에 있을 땐 집 안 오고 싶어서 버티다 겨우 들어오곤 했었다. 중3 아들은 점점 능글이 한도 초과되어, 그걸 듣고 있자니 매끼 공갈빵만 먹어야 하는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딸도 늘 그렇듯 자기 일로 바쁘니 차라리 떨어져 있는 게 괜히 섭섭할 일도 없고 좋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몸과 몸이 붙어있는 시간 자체가 거의 없어지고 아이들의 삶이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잘 형성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어느덧 이골이 난 나날들 속에서 강제로 빠져나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만 듣고 있으려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세트장 하나가 마련된 것 같기도 하다. 특별한 설정 속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아무리 분리되고 있는 중이라 해도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만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구나 싶다. 묘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도 그런지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을 자꾸 한다.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 아니고 진심 그런다. 심지어 마스크를 쓰고 방문을 딱 눈만 내놓을 만큼 살짝 열고 아이들을 본다. 이렇게 애틋하다니, 별일이다 정말.
어릴 때 한 시간만 못 봐도 전화해서 울먹거리면서 ‘엄마 어디야? 왜 안 와?’ 하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맞네, 그런 때가 있었지 싶다. 점점 한 시간이 두어 시간이 되고 이젠 며칠을 여행 다녀와도 아이들이 울 걱정은 안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을 지나왔구나 싶기도 하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애틋한 감정이 만져졌다. 그 시절이 어느 만큼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방에 격리되어, 잊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아픈 건 싫지만, 가족들도 걸릴까봐 마음이 계속 조마조마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추억의 시간을 갖게 된 건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던 무빙워크가 잠시 운행을 중단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흘러가는 일상에서 내려보니, 잊은 듯했던 옛날 기억이 떠오르는가보다.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야 하기에 사람의 뇌가 그렇게 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멈추지 않으면 대체로 수월하게 잊혀지는.
만약에 지금보다 더 나이가 많이 들면 어떨까. 아마 그때는 무빙워크의 속도가 젊은 사람들에 비해서 많이 느려질테지. 그러면 나의 뇌도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더 잘 되새기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빠른 무빙워크에 올라 타 있을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부쩍 많아질 것도 같다.
202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