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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Aug 11. 2023

김만봉 가출 15일 전

    

“형! 우리 착한 둘째 사위가 내게 수면제를 가져다주기로 했어.”

“정말 착한 사위이군, 그런데 가져다주면 정말 먹을 생각이야?”

“그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보다 안전한 죽는 방법은 없어.”

대봉이 슬픈 눈으로 만봉을 보았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대봉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 약은 어떡하지? 희수가 나더러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만봉은 식탁에 있던 약통을 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

“응, 왜 인간들은 더 이상 소용도 없는 일에 정성을 쏟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왜 소용이 없어?”

“이깟 약을 먹는다고 이미 생겨버린 치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이런 걸 왜 먹으라고 하는 건지.”

“그래도 죽기 전까지는 먹는 게 좋지 않겠어?”

만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수면제를 먹기로 한 이상 이 약은 필요 없어.”

“약이 그대로 있으면 희수가 걱정할 텐데......”

“그렇지? 그럼 이걸 희수 몰래 어디에 버린담?”

만봉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콕콕 찔렀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대봉이 말했다.

“쓰레기통에 버려.”

“안 돼! 희수가 발견할지도 몰라.”

“그럼 변기에 버려.”

“변기?”

“응, 인간들은 모든 오물을 변기에 버리잖아. 너한테 더 이상 쓸모없어진 물건이니 오물이나 마찬가지 아냐?”

대봉을 보던 만봉이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약을 바라보았다. 아침이라고 써진 작은 통 안에서 약들이 굴러다녔다. 만봉은 약통을 높이 들어 흔들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약은 이제 나한테는 오물이나 마찬가지야.”

만봉은 약을 꺼내 손바닥에 쏟아붓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 앞에 서서 손을 펴 약을 확인한 후 변기에 던지고 물을 내려 약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희수가 캐리어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희수는 불 켜진 화장실로 다가와 변기를 우두커니 보고 서 있는 만봉에게 말했다.

“아빠 뭐 해?”

그 목소리에 만봉은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빠! 괜찮아?”

희수가 주저앉은 만봉을 부축해 일으켰다.

“깜짝이야! 너 때문에 하마터면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잖아!”

 만봉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빠르게 곁눈으로 변기를 보며 약이 확실히 사라졌는지 확인했다.

“뭐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놀라는 거야?”

“넌 아침부터 우리 집에 무슨 일이냐?”

만봉이 희수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아빠는 매일 오는 딸한테 새삼스럽게 왜 그래? 약은 먹었지?”

“약?”

손을 씻으려던 만봉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약 안 먹었어?”

“먹었지, 왜 안 먹어?”

만봉은 다시 변기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와 거실에 놓여있는 캐리어를 발견하고 말했다.

“이 가방은 뭐냐? 너 어디 여행 가냐?”

희수가 캐리어를 현관문 앞에 있는 방으로 끌어놓았다.

“맞아, 나 여행 가.”

“젊다는 게 역시 좋구나, 난 너처럼 젊은 시절에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네 엄마랑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가봤는지.”

만봉이 혼잣말인지 넋두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건 아빠가 범인 잡는다고 늘 바빠서 그랬지. 대신 환갑 때 우리가 스페인 보내드렸잖아.”

“그랬지, 그게 네 엄마랑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그건 아빠가 다시는 바퀴 없는 비행기는 탈 생각이 없다고 소리를 질러대서 그런 거잖아.”

만봉은 한숨을 내쉬고 비행기를 타던 그날이 떠오른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엄마처럼 인생 재미없게 살다 간 사람도 없을 거다.”

희수가 만봉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러니까 아빠도 후회하지 않게 재미있게 살아.”

“이제 와서?”

“지금이 어때서?”

만봉이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쯤 먹고 나면 사는 게 그냥 그래, 그다지 재미있는 일도, 설레는 일도 없어.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아무것도 없어.”

“치! 아빠 나이가 어때서?”

만봉이 피식 웃었다.

“그래 여행은 어디로 가니?”

만봉을 빤히 바라보던 희수가 만봉의 팔짱을 꼈다.

“아빠 집으로.”

“뭐?”

“나 아빠 집으로 여행 왔다고. 이제부터 여기서 아빠랑 살 거야.”

“너는 아침부터 비싼 밥 먹고.”

“신소리하고 있어!”

희수가 만봉의 말을 받아쳤다. 만봉이 그런 희수를 바라보며 다시 피식 웃었다.

“괜히 쓸데없는 일 했구나, 밥 먹고 돌아가거라.”

희수는 그런 만봉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벌렁 누웠다.

“싫어, 아빠가 우리 집으로 가지 않는 이상 나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넌 어릴 때는 안 그러더니 나이 먹을수록 왜 그렇게 고집이 세지는 게냐?”

“이게 다 아빠 딸로 사느라 고생해서 그런 거야.”

만봉은 물끄러미 희수를 내려다보았다. 희수는 옆으로 누워 TV를 보며 낄낄 웃었다. 그런 희수의 관자놀이 주변으로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였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에에? 우리 아빠 이제 맏딸 나이도 모르고!”

“30은 넘었지? 아직 40을 넘지는 않았을 테고.......”

만봉은 희수의 하얗게 바랜 새치가 보기 싫은 듯 손으로 자꾸 쓸어댔다. 그렇게 하면 흰머리가 검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좀 젊어 보이긴 하지, 그렇대도 40을 넘지 않았다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럼 정말 40도 넘었다는 말이냐?”

“아빠는, 아빠 맏딸 내일모레면 쉰이야.”

“쉰? 쉰이 몇 살이더라?”

희수는 일어나 앉아서 만봉의 손을 잡았다.

“어휴, 우리 아빠 왕년에는 조폭들도 맨손으로 때려잡았었는데......”

희수의 말에 만봉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랬지, 덩치가 이만한 조폭들이 나만 보면 벌벌 떨고 그랬었지.”

만봉이 팔을 들어 양끝으로 벌리며 말했다.

“그랬던 아빠가 이렇게 쪼그랑 할아버지가 됐네.”

“뭐? 쪼그랑 뭐?”

희수가 깔깔 웃어댔다. 한참을 웃던 희수가 다시 만봉의 손을 잡고 마주 보며 말했다.

“아빠! 우리 집 가자!”

“싫어!”

“대체 왜 싫어?”

“그렇게 되면 내 계획이 모두 틀어져.”

“계획? 무슨 계획?”

“아! 시끄러워, 그런 게 있어. 그리고 너희 집에 가면 강서방이 불편해할 거야.”

“아니야, 강서방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아빠도 알잖아.”

문득 만봉은 뭐가 떠오른 듯 말했다.

“강서방 말이야.”

“강서방이 왜?”

만봉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몸을 희수에게로 기울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펴서 입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강서방 사실 여자 있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충격받지 말고 들어.”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강서방이 성혜은하고 주둥이 맞춰보는 거 봤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밤에 무슨 꿈이라도 꾼 거야?”

“이 미련한 것아. 네가 이렇게 아빠한테 정신을 팔고 있으니 강서방이 바람이 난 거 아니냐.”

희수는 씩 웃었다.

“알았어, 내가 강서방도 더 잘 챙길게.”

“그게 아니라 정말 바람이 났대도.”

“어휴, 우리 아빠 형사를 할 게 아니라 소설가를 했어야 했네.”

“넌 나이도 젊은 게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는 게냐?”

“아빠! 우리 밥 먹고 여기 앞에 바람 쐬러 가자.”

“안 가! 날도 추운데 얼어 죽을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얼른 집에나 가!”

“나 안 간다니까!”

“그러다가 강서방이 집에 성혜은이라도 데려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런데 대체 성혜은이 누구야?”

“그 간호사말이야.”

“간호사?”

“그래, 너하고 병원 갔을 때 앉아있던 그 간호사.”

희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봉을 보았다. 그때 만봉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왜 그래?”

“너 빨리 집에 가!”

“아빠! 제발 이러지 좀 마! 아빠가 이러면 나 정말 힘들어.”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란 말이야. 가서 성혜은년이 집에 못 오게 감시하란 말이야.”

“아빠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가?”

“다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라고!”

갑자기 만봉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희수를 밀쳤다.

“아빠!”

놀란 희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만봉은 식탁 어디쯤을 보며 눈을 찡긋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희수는 만봉의 시선을 따라 식탁을 보았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만봉을 보았다.

“아빠 지금 누구한테 눈짓한 거야?”

다시 식탁 쪽을 바라보던 만봉이 굳어진 얼굴로 현관 앞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희수의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대체 왜 그래?”

“당장 집에 가!”

“아빠!”

“너 정말 아빠 말 이렇게 안 들을 거야?”

그러더니 만봉은 캐리어를 현관 밖으로 끌어냈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너야말로 고집부리지 마!”

캐리어를 현관 밖으로 끌어낸 만봉이 이번에는 희수의 팔을 잡아 현관 밖으로 밀어냈다. 희수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집 밖으로 쫓겨났다. 만봉은 희수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밀어내고 현관에 있던 신발을 희수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문을 쾅 닫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어이가 없어진 희수는 우두커니 그대로 있었다. 그때 다시 현관문이 열리더니 만봉이 고개를 내밀었다.

“너 다시 한번만 더 내 집에 오면 그때는 정말 아빠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소리를 지른 만봉은 그대로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의 센서등마저 꺼지자 희수는 어둠 속에 갇혔다. 밀려드는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하루가 다르게 만봉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요란하게 울려댔다. 희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어머니 경자였다.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다가 길게 숨을 내뱉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그래, 너 지금 뭐 하니?”

“지금 아빠 집인데 왜 그러세요?”

경자의 짧은 한숨소리가 수화기너머로 들렸다.

“너 바쁘지 않으면 나 좀 보자.”

“지금이요?”

“넌 왜 꼭 두 번씩 말을 시키니?”

“지금은 가기가 좀 그런데.”

“지금 너랑 꼭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런다.”

“그냥 전화로 하시면 안 될까요?”

“이젠 친정아버지 핑계로 난 만나지도 않을 셈이냐?”

희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지금 갈게요.”

희수는 캐리어를 만봉의 현관문 옆 한쪽에 밀어 두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희수를 밖으로 내쫓은 만봉은 현관문에 붙어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때 대봉이 옆으로 다가왔다.

“희수 갔어?”

대봉의 물음에 만봉이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쉿! 아직 안 갔어.”

대봉은 만봉의 곁으로 가 똑같은 모양으로 현관에 귀를 붙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둘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곧 현관에서 떨어졌다.

“형! 나 잘한 거겠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희수는 강서방을 뺏기고 말 거야. 여우 같은 성혜은한테.”

“그래, 잘했어.”

대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희수를 너무 세게 밀어낸 건 아닌지 모르겠어. 희수가 넘어질 뻔했어.”

“살살 좀 밀지 그랬어?”

대봉이 책망하듯 말했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힘이 솟는 바람에, 아무튼 희수가 날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희수도 네 마음을 알 거야.”  

   

잠시 후 희수가 경자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래 왔니? 이리로 와서 좀 앉아봐라.”

경자는 식탁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희수는 경자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늘 진 눈동자로 경자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세요?”

“넌 젊은 애가 얼굴이 그게 뭐니?”

경자의 말에 희수는 손으로 볼을 감쌌다. 그런 희수를 보며 경자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너 30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

희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짜 3종 세트 위주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알죠! 어머님 생신이잖아요.”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그렇잖아도 식당을 어디서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 생일에는 이모들 모두 초대하려고 한다.”

“네? 다섯 분 모두요?”

“그래, 그리고 식당이 아닌 우리 집에서 했으면 한다.”

희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님 집에서요? 왜 갑자기......”

“뭘 그렇게 놀라니?”

“그럼 출장뷔페를 부를까요?”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할 거 아니다. 그리고 나도 있고 너도 있는데 무슨 출장뷔페씩이나......”

“그렇긴 한데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제가 친정아빠 때문에......”

“그래서 말인데.”

경자가 희수의 말을 잘랐다. 희수는 두 손을 모으고 경자를 보았다.

“바깥사돈 이제 그만 요양병원에 모시는 건 어떠니?”

“네?”

“그렇잖니, 어차피 치매에 걸린 거 너도 힘들고 아마 바깥사돈도 요양병원이 더 편하실 거다. 그리고 지금 네 정신에 우리 민준이 내조는 제대로 하겠니?”

“민준씨는 다 이해해 주고 있어요.”

“그건 우리 민준이가 착해서 말을 못 할 뿐이지, 어떻게 여자가 밖으로 나도는데 그걸 이해하겠니?”

“밖으로 나도는 게 아니라......”

“또, 또! 넌 내 말에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토를 달더구나!”

경자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희수를 보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빠를 요양병원에 모실 수는 없어요.”

“이게 그렇게 고집부린다고 될 일이니?”

희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희 친정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신 다음 주 어머님 생신은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할게요.”

“넌 참 미련하게 고집이 세구나.”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투와 가방을 들었다. 경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경자가 말했다.

“난 그렇게 치매환자 돌보면서 차린 생일상은 받기 싫다!”

희수가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네?”

경자는 팔짱을 낀 채 희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하거라.”

“뭘 판단하라는 말씀이신지.”

“필요하다면 시설 좋은 요양원은 내가 알아봐 줄 수도 있다.”

“어머니!”

“그만 가 보거라!”

경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희수는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꽉 쥔 채 경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뱉은 후 희수는 밖으로 나갔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민준이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환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은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그 어떤 아픔도 외로움도 없을 것만 같았다. 샤워를 마친 혜은이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창밖을 보고 있는 민준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이 참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져.”

“천천히?”

“여유롭고 편안하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말이야.”

“그건 지금 나랑 있는 오빠가 그만큼 편안하다는 말이지?”

“글쎄?”

“글쎄라니? 아니라는 말이야?”

 민준은 대답 없이 혜은의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오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혜은이 고개를 들어 민준의 얼굴을 보았다. 민준이 그런 혜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장인어른이 집사람한테 우리 이야기를 할까 봐 불안해.”

“우리 이야기?”

“그래, 지난번 계단에서 있었던 일.”

혜은이 민준을 밀어냈다.

“왜? 오빠 마누라가 알게 되면 이혼이라도 하잘까봐?”

“성격이 워낙에 깔끔한 사람이라.”

“그게 그렇게 겁이 나? 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절대 이혼은 못해.”

혜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늘 궁금했는데 오빠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대체 왜 이혼을 못한다는 거야?”

“사랑하지 않을 뿐이지 미워하지도 않아.”

“그게 더 심각한 거지. 아무 감정이 없다는 말이잖아. 그런 여자랑 왜 살려는 거야? 그냥 이혼하면 안 돼?”

“아니! 절대 이혼할 수 없어!”

민준이 화가 난 얼굴로 혜은을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그럼 난 뭐야? 언제까지 숨어서 오빠를 만나야 하는 건데?”

“혜은아! 네가 자꾸 이러면 난 널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난 오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

민준이 길게 숨을 뱉었다.

“이혼을 하게 되면 모든 게 무너져.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민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혜은이 입술을 삐죽이고는 민준의 옆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짧게 숨을 뱉었다.

“노인네가 그런 말 한다고 누가 믿기나 하겠어? 노망 난 노인네가 지껄이는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겠지.”

민준이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확실히 젊은 시절에 형사를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대단해.”

“무슨 눈썰미?”

“너를 외래에서 두 번 봤을 뿐인데 바로 알아봤잖아.”

“그래봤자 치매에 걸린 노인일 뿐이야.”

그때 민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민준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만봉이었다. 민준은 혜은을 향해 손가락을 입술 위에 대보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장인어른!”

“강서방 지금 어딘가?”

“지금요? 지금 병원인데 왜 그러십니까?”

“병원인가?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네. 그럼 마침 잘됐네. 당장 주둥이한테 가서 그만 만나자고 말하게!”

“갑자기 전화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 다 알고 있네.”

“뭘 말씀이십니까?”

“자네와 주둥이년 사이.”

“아니라고 몇 번 말씀드립니까?”

“설마 자네........”

“왜 그러십니까?”

“자네 지금 주둥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니지?”

민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왜 그 여자랑 같이 있습니까?”

“내가 말했었나? 나 왕년에 형사였다고.”

“그건 익히 잘 알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랬나? 아무튼 그래서 내가 촉이 상당히 좋다네.”

“촉이요?”

“그래, 촉! 내가 자네가 아주 많이 의심스러워서 희수를 집으로 돌려보냈네.”

“집으로요?”

“그래, 그러니 희수 없다고 주둥이를 집에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도 말게.”

“그런 생각 안 합니다.”

“내 며칠 말미는 주겠네.”

“말미라니요?”

“며칠 후에도 자네가 여전히 성혜은이랑 주둥이 맞춰보는 그런 사이면 난 희수에게 모든 사실을 다 말할 수밖에 없네. 물론 희수가 내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내게는 희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거든, 그러니 명심하게!”

“그런 거 아니라는데......”

“끊겠네, 그럼 늦은 시간에 수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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