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민준은 신경과 외래로 들어섰다.
“박교수 님 계시죠?”
진료실 앞에 앉아있는 혜은이 민준을 보자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네, 기다리고 계세요.”
민준은 혜은을 향해 슬쩍 눈인사를 건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박성현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민준이 들어서자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강교수 왔나?”
“네, 선배님!”
민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성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네 장인 일로 제수씨가 상심이 크겠군."
"네, 좀 그렇습니다."
성현이 민준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강교수 장인, 그러니까 김만봉 씨는 치매 중에서도 루이소체 치매에 가깝네.”
“루이소체요?”
“응, 신경계에 루이소체라고 하는 독성 단백질이 쌓여서 발생하는 병이야.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환시를 본다는 게 특징이네, 그것도 제법 구체적인 모습의 환시를.”
“그렇잖아도 가끔 헛것을 보는 모양이더군요.”
“혹시 렘수면 장애는 없었다던가?”
“렘수면 장애요? 아!”
민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현을 보았다.
“예전에 장인어른이 젊었을 때 주무시다가 꿈결에 장모님을 때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때려?”
“네, 장모님이 놀라서 도망가면 따라가면서까지 때렸다고. 그런데 정작 잠에서 깨면 본인은 기억을 못 하신다더군요.”
“음, 역시 그랬군, 김만봉 씨는 머지않아 파킨슨이 올 확률이 높아, 어쩌면 이미 왔을 수도 있고.”
“파킨슨이요?”
“렘수면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파킨슨이나 치매와 같은 신경 퇴행 질환을 진단받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제법 심각한 이야기군요.”
“그렇지? 빠른 시일 내에 파킨슨 검사도 해보도록 하지. 사실 지난번에 걷는 모습을 보니 걸음걸이가 좀 부자연스럽더군.”
"그렇군요."
잠시 후 민준은 굳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그런 민준을 혜은이 빤히 보았다. 민준은 혜은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빠르게 신경과를 빠져나갔다.
퇴근을 하고 진료실을 나서는 민준의 앞을 준석이 막아섰다.
“형님! 퇴근하십니까?”
“자네가 웬일이야?”
“바쁘시지 않으면 저 술 한 잔만 사주십시오.”
민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오랜만에 만봉의 집에 들르려던 계획을 접고 짧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에 둘이 술 한 잔 하지.”
민준과 준석은 병원 건너편에 위치한 일식집으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임에도 홀은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룸으로 들어간 민준이 겉옷을 벗자 준석이 냉큼 그 옷을 받아 들어 옷걸이에 걸었다.
“요즘 은행 일이 많이 바쁜가?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민준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준석은 자신의 외투마저 옷걸이에 걸고 맞은편에 앉았다.
“네, 좀 그렇습니다.”
“그렇잖아도 장인어른 일로 자네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네.”
그때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차려지고 두 사람은 술잔을 채웠다.
“장인어른이 왜요?”
민준은 술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고개를 들어 준석을 보았다.
“장인어른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까?”
“며칠 전에는 장인어른 혼자서 병원에 찾아오셨더군.”
“처형도 없이 혼자요?”
“응.”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혼자 병원을 찾아가실 정도면 아직은 정신이 맑으신가 봅니다.”
“문제는 병원에 혼자 오는 바람에 길을 잃었던 모양이야.”
“네?”
“내가 동료 직원하고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거기를 와서는 난리도 아니었어.”
“난리라뇨?”
“그 직원을 외래 간호사와 착각을 하시고는 뒷목덜미를 잡고 욕을 해대더니 나더러 바람피우는 거냐고 노발대발하더라니까.”
“정말입니까? 형님이 많이 곤란했겠습니다.”
“겨우 달래서 안심시켜 드리긴 했는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더군.”
“생각보다 많이 심각하군요.”
민준은 말을 하며 준석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집사람한테 헛소리나 안 하시면 다행이겠어.”
“헛소리요?”
“그래, 내가 병원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봤다는 둥, 뭐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초조해 보이는 민준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천천히 드십시오.”
“오늘 담당교수님을 만났는데 빠른 시일 내에 파킨슨 검사도 해보라는군.”
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킨슨까지,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그런데 집에 혼자 계시게 해도 괜찮을까요?”
“마음 같아서야 당장 집에 모시고 오고 싶은데 장인어른이 워낙 고집불통이라 말을 들어야 말이지.”
“아니면 집에 간병인을 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고집인지 집사람은 장인어른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아. 일단 당분간은 집사람이 장인어른 집에 있으면서 돌보기로 했어.”
“처형이 처가로 들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민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은 혼자 지내시고요?”
“뭐 어쩔 수 없잖아. 집사람이 그러고 싶어 하니.”
“집에 환자 한 명 있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처형은 이미 처가로 들어갔습니까?”
“일단 내가 당분간 먹을 밑반찬과 옷을 준비해 두고 며칠 내로 가기로 했어.”
민준은 다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민준을 바라보는 준석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데 자네는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이번에는 준석이 술을 들이켰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숨을 길게 내쉰 준석이 민준을 보았다.
“형님!”
“응?”
준석이 입을 떼고 망설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 저 돈 좀 빌려주십시오.”
“돈? 갑자기 돈은 왜?”
“꼭 필요해서 그럽니다.”
“얼마?”
“형님 어느 정도 여유가 되십니까?”
민준은 잔을 내려놓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몸을 뒤로 기댔다.
“대체 얼마가 필요하길래 그런 걸 묻지?”
“형님 여유가 되는대로 좀 빌려주셨으면 해서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준석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죽고 싶습니다.”
“뭐?”
“사실 얼마 전에 은행에서도 잘렸습니다.”
“잘리다니 갑자기 왜?”
“그게....... 작년에 불법대출을 좀 받았었는데 그게 이번에 걸렸지 뭡니까?”
“불법대출?”
준석이 잔에 술을 채운 후 들이켰다.
“제가 가족들 명의로 대출을 좀 받았습니다.”
“뭐?”
민준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준석을 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뭐 때문에? 그래서 그 돈은 다 어쨌어?”
“주식이요.”
“주식?”
준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준석을 보며 이번에는 민준이 한숨을 짧게 뱉었다.
“그래서 얼마나 손해 본 거야?”
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3억이요.”
“뭐? 3억? 자네 제정신이야?”
“압니다. 저 제정신 아닌 거. 하지만 이제 어쩝니까? 이미 다 엎질러졌는데.”
“처제는 알고 있어?”
“아직 모릅니다. 주식으로 돈을 날렸다는 것도, 은행에서 잘렸다는 것도.”
민준이 한숨을 쉬었다.
“형님! 그러니까 저 3억만 빌려주십시오.”
준석이 고개를 들어 민준을 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한테 3억이 어디 있나? 그리고 있어도 못 빌려줘.”
“왜 못 빌려준다는 겁니까?”
“돈 주는 대로 다시 주식판에 달려들 게 뻔한데 어떻게 빌려줘?”
“절대, 절대 다시는 안 합니다.”
“그렇다 해도 빌려줄 수는 없어!”
“일단 급한 대로 사채는 갚아야 합니다.”
“뭐? 자네 사채까지 끌어다 썼나?”
준석이 고개를 떨구었다.
“미쳤군.”
민준과 헤어진 준석은 밤거리로 나섰다. 어차피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 매서운 바람이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세상이 많이 차가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코를 훌쩍였다.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들었는데 저쪽에서 택시가 준석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노란불을 밝히고 서있었다. 준석은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가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안은 은은한 편백나무 향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바깥의 차가운 날씨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준석은 그런 택시가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아서 코끝이 찡했다.
“마포대교로 갑시다.”
“마포대교요?”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준석을 보았다.
“그냥 일이 좀 있어서 그럽니다. 기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 조용히 갑시다.”
기사는 룸미러로 준석을 흘금거리며 천천히 택시를 출발시켰다. 준석은 창에 비스듬히 기대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한 중년의 남자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고 젊은 커플이 서로를 감싸 안은 채 그 중년의 남자를 지나쳐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준석은 지금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오로지 자기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준석을 태운 택시는 그들을 지나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더 이상 사채업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해도 그 빚을 결코 갚을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준석의 어깨를 짓눌렀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준석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은수와 리은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됐는데 웃음이 났다. 모든 걸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히죽히죽 웃던 그때 불현듯 집에 혼자 있을 만봉이 떠올랐다.
준석은 눈을 번쩍 뜨고 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어쩌면 만봉이 자신에게 마지막 동아줄이 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준석은 상기된 얼굴로 노년의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마포대교 말고 잠실로 갑시다. 00아파트요.”
만봉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좋은 방법이 떠오른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대봉이 보이지 않았다.
“형! 형 어디 있어?”
만봉이 부르자 방에서 대봉이 걸어 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드디어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무슨 좋은 방법?”
“죽는 좋은 방법.”
“또 그 이야기야?”
“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편안하게 잘 죽는 거거든.”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 그 좋은 방법이라는 게 뭐야?”
“수면제야!”
“수면제?”
“언젠가 드라마에서 봤어. 어떤 젊은 여자가 죽으려고 약을 잔뜩 먹었거든.”
옆에서 대봉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봉을 빤히 보았다.
“내가 무슨 약이냐고 희수한테 물었더니 수면제라고 하더군, 생각해 보니 내가 형사이던 시절에도 수면제를 먹고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래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거야. 나도 그 여자처럼 죽어야겠다고.”
“진심이야?”
“형도 생각해 봐. 수면제를 먹으면 잠이 들 거 아냐? 그럼 난 편안히 잠들면 되는 거고 다시 안 깨어나면 끝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 이보다 더 편하게 죽는 게 어디 있겠어?”
“그런 거야?”
“그럼, 그러니 수면제를 사야겠어.”
만봉의 집 현관 비밀번호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0000이었는데, 그건 본인의 이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만봉이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만’이라는 숫자의 0의 개수와 일치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고심 끝에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운 좋은 도둑이 혼자 사는 노인을 만만히 보고 마음먹고 침입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몇 번만 시도해 본다면 쉽게 열 수 있는 숫자이기도 했다. 다행히 만봉이 사는 동네에는 그만큼 운이 좋은 도둑은 없었다.
만봉의 집에 도착한 준석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딱히 염탐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엉거주춤 현관 안으로 머리부터 들이미는 모양새가 불순한 목적이 있는 사람의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만봉은 소파에 앉아서 중얼거리느라 준석의 머리가 반 이상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준석은 만봉이 혼자 떠드는 모습이 이상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춘 채 만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면제 운운하며 편하게 죽는 방법에 대해 혼자 중얼대는 만봉을 의아하게 보다가 조용히 인기척을 냈다.
“장인어른?”
하지만 만봉은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수면제는 어디서 사야 하는 거지?”
“장인어른!”
준석은 이번에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만봉을 불렀다. 만봉은 그제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허락도 없이 현관에 들어와 있는 준석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80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순발력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행히도 그 순발력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인공관절이 삐그덕 거리는 바람에 만봉은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장인어른! 괜찮으십니까?”
만봉의 관절만큼 놀란 준석이 빠르게 거실로 뛰어들며 만봉을 일으켰다. 만봉은 일어나며 관절이 여전히 제자리에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릎을 어루만지며 곁눈으로는 대봉이 그 자리에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대봉은 그 자리에 없었다. 만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자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너의 생뚱맞은 방문이 전혀 반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만봉이 말했다.
“그냥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장인어른 생각이 나서요.”
만봉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무릎을 어루만지며 대봉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뭘 말인가?”
“아까부터 왜 자꾸 두리번거리십니까?”
“내가 언제?”
“지금 계속......”
“시끄럽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만봉의 눈치를 살피던 준석이 소파 아래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만봉은 그 모습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장인어른! 아니, 아버님!”
“왜!”
“저 돈 좀 주십시오. 아니, 빌려 주십시오.”
“뭘 줘?”
“아버님 돈 가지신 거 있잖습니까?”
“돈? 있지. 얼마나?”
“아버님 돈 얼마나 있으신데요?”
“나 돈 많지. 사실 우리 마누라랑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으려고 악착같이 모아놨어.”
“정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준석의 눈은 기쁨으로 위로 치솟았고 만봉의 눈은 슬픔으로 아래로 쳐졌다.
“그럼 뭐 하나! 정작 우리 마누라한테는 한 푼도 제대로 못 썼는데 죽어버렸잖나.”
“장모님 돌아가신 건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네도 희수.......”
말을 하려던 만봉이 갑자기 얼굴을 준석에게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준석이 몸을 뒤로 살짝 뺐다.
“음! 강서방이 아니군 그래, 자네는 서서방이야,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은수 남편입니다.”
“그래, 그러니 자네도 은수한테 잘하게. 더 늙어서 후회하지 않게.”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돈은 얼마나.......”
“솔직히 나도 우리 마누라가 그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왜 안 그러시겠습니까?”
“이제 남은 인생 즐겁게 살자고, 젊었을 때 내가 못살게 굴었던 건 다 잊어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덜컥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어.”
이야기에 몰입했는지 만봉의 표정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다리가 점점 저려온 준석은 슬그머니 다리를 풀고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았다.
“그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마 우리 마누라는 억울해서 눈도 편히 못 감았을 거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생각에 준석은 긴장을 풀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라니, 자네도 생각이란 걸 해 보게.”
“네?”
“평생 형사 마누라로 살면서 저놈의 남편이 어디 가서 칼이나 맞지 않을까, 대체 집구석에는 언제 기어들어오는 걸까, 그러다가 어쩌다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밥상을 엎고 성질만 부렸으니......”
“네.”
“그러니 우리 마누라 속이 성할 리가 있었겠나?”
“그렇겠군요.”
만봉은 긴 한숨을 내쉬고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소맷부리로 콕 찍어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자네가 하려던 이야기가 뭔가?”
준석은 다시 무릎을 꿇고 똑바로 앉았다.
“저 돈 좀 빌려 주십시오.”
“아, 참! 돈을 달라고 했지.”
“네, 부탁드립니다.”
“자네, 내가 돈을 얼마나 모아놨을 것 같나?”
“글쎄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셨으면 제법 될 것 같은데요.”
준석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준석을 빤히 보던 만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온 만봉의 손에 통장이 들려있었다. 반짝이던 준석의 눈이 더 커졌다. 만봉이 소파에 앉으며 통장을 준석에게 내밀었다.
“한 번 보게!”
준석은 빠른 속도로 통장을 열어 잔액을 확인했다.
“일, 십, 백, 천.......”
잔액을 확인한 준석의 눈이 환희에 반짝였다.
“3억! 장인어른, 아니, 아버님! 3억이나 있으십니까?”
“그런가? 거기에 3억이 있다고 쓰여 있나?”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많군 그래.”
“이 사실을 처형이나 은수가 알고 있습니까?”
“뭘 말인가?”
“아버님 통장에 이런 돈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걸 뭐 하러 애들한테 말하나? 나도 노인정에서 들어서 잘 알고 있네.”
“뭘 말입니까?”
“죽을 때까지 자식들한테 돈 주지 말고 꼭 쥐고 있어야 한다고.”
“노인정에서 그런 말들을 합니까?”
“그래, 돈을 자식들한테 주는 순간 찬밥이 된다더군, 나도 그 말에 적극 공감하는 바야.”
“그럼 자식들 아무도 모르는 돈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준석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만봉을 보았다.
“그래! 내 이걸 다 자네한테 주겠네.”
“네? 정말이십니까?”
준석의 눈에 환희의 눈물이 고였다.
“단,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만봉은 몸을 준석에게로 기울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입이 무거운 편인가?”
“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말일세.”
준석은 만봉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든 믿고 맡겨 주십시오. 저 이때까지 신용하나로 먹고 산 놈입니다.”
말하는 준석의 양심이 조금 뜨끔했지만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지금 양심의 가책 따위나 느끼고 있을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니었다. 만봉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준석을 보았다.
“정말 믿어도 되겠나?”
“안심하고 말씀하십시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만봉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 좀 죽여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