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한 은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만봉의 집으로 들어섰다. 만봉은 소파에 앉아 한 손에 리모컨을 꼭 잡은 채 TV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희수가 막 설거지를 끝내던 참이었다.
“아빠! 나 왔어요.”
은수가 큰 소리로 말하자 만봉은 고개를 돌려 은수를 한번 흘깃거리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둘째 딸은 아는 체도 안 하네.”
“밥 안 먹었지? 앉아. 밥 차려 줄게.”
희수가 은수를 향해 말했다.
“아냐, 생각 없어. 그냥 여기 좀 앉아 봐.”
은수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희수는 커피를 은수 앞에 놓아주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형부 저녁은?”
“형부 내일 학회가 있어서 지방에 내려갔어. 너는 제부 퇴근할 때 된 거 아니니?
“준석씨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지 집에서 얼굴 보기 힘들어.”
“왜? 은행에 무슨 일 있어?”
“모르겠어,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무슨 엉뚱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엉뚱한 짓?”
은수는 말을 하려다가 한숨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잔을 들어 커피를 홀짝 마셨다.
“언니! 요즘 많이 힘들지? 거울은 보고 살아? 얼굴이 말이 아니야.”
“내 얼굴이 왜.”
희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간병인을 알아보는 건 어때?”
“그건 좀 더 있다가, 당분간은 할 수 있는 한 내가 하고 싶어.”
은수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만봉을 흘깃 쳐다본 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런데 언니! 아빠한테 치매라고 말 안 했어?”
“그런 말을 뭐 하러 해!”
“아빠도 알아야 언니 말에 협조를 잘하실 거 아냐.”
“내 말에 협조 따위 하실 필요 없어. 너 행여나 아빠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희수가 미간을 찌푸리고 경고하듯 말했다. 은수는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이미 말했어.”
“뭘?”
“치매라고 아빠한테 말했다고.”
“뭐?”
희수가 놀라서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소파에 있던 만봉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하지만 곧 흥미를 잃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야?”
“그래! 언제까지 언니 혼자서 아빠 비위 다 맞춰가며 고생할 수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아빠도 알 건 아셔야지.”
희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빠는 뭐라고 하셨어? 많이 놀라셨지?”
“뭐 좀 그런 것 같아.”
“그냥 말하지 말지 그랬어.”
“난 아빠가 알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렇게까지 놀라실 줄은 나도 몰랐어.”
희수가 고개를 떨구었다.
“너 아빠가 요즘 얼마나 외로워하시는지 알기나 하니?”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외롭겠지.”
“그런 아빠가 넌 불쌍하지도 않아?”
은수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의자 뒤로 기댔다.
“나도 아빠가 불쌍해, 하지만 어쩌겠어,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 나도 외롭고 언니도 외롭잖아.”
“우린 아직 젊잖아.”
“젊은 게 왜? 뭐 젊은 사람은 외로워도 되고 늙은 사람은 외로우면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아빠한테는 이겨낼 힘이 없다는 거야.”
그때 만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희수와 은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만봉을 보았다. 만봉은 옆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짓을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빠!”
희수가 불렀지만 만봉은 여전히 그 자세로 있었다. 희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만봉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
희수가 만봉의 어깨를 손으로 잡자 만봉은 화들짝 놀랐다.
“응? 왜?”
“방금 뭐라고 했어?”
“뭘? 내가 언제?”
“방금 옆에 보면서 뭐라고 했잖아.”
만봉은 대봉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긴장해서 굳은 어깨를 더 움츠리며 말했다.
“너는 꼭 비싼 밥 먹고 신소리 하더구나, 그렇게 헛소리 할 거면 집에 가! 나 그만 자련다.”
만봉은 여전히 긴장한 채 소파에서 일어나 옆을 한 번 흘금거린 후 흡사 로봇을 연상시키는 상당히 어색한 걸음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희수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아빠 왜 그래?”
은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 너도 들었지, 아빠 중얼거리는 거!”
“응.”
“이젠 정말 억지로라도 집으로 모시고 가야겠어.”
만봉은 침대에 누워 딸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며 귀를 밖으로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희수와 은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만봉은 잠이 든 척 빠르게 눈을 꼭 감았다.
“뭐야? 아빠 주무시는 거 맞아? 아까부터 어깨는 왜 이렇게 움츠리고 계신 거야?”
은수의 말에 만봉은 들키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을 스르르 풀었다. 그렇잖아도 어깨가 왜 이렇게 불편한가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빠 주무시는 거 같으니까 우린 가자.”
희수는 말을 하며 이불을 끌어서 만봉의 어깨를 덮었다. 만봉은 자는 척한 게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뻐 조금 더 연기를 해 보기로 작정했다. 코에 힘을 잔뜩 준 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역시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코를 고는 연기를 선보일 작정이었다.
“드르렁 컥 헉 컥.”
너무 과하게 들이마신 게 문제였다. 갑자기 숨이 콱 막혔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빠! 괜찮아?”
놀란 희수가 만봉을 흔들어 깨웠다. 숨 막힌 걸 참느라 만봉의 얼굴은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응? 왜? 뭐?”
연기가 실패했음을 깨달은 만봉은 그럼에도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려 애쓰며 슬쩍 눈을 떠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빠 지금 코 골다가 숨을 안 쉬는 것 같아서.”
“숨을 안 쉬긴 누가?”
희수는 만봉이 괜찮은 걸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이제 정말 안 되겠어, 우리 집으로 가자.”
“시끄러워! 멀쩡한 내 집 두고 왜 쓸데없이 네 집을 가!”
“불안해서 도저히 아빠 혼자 못 두겠어.”
만봉은 괜한 연기를 선보인 걸 후회했다.
“난 혼자가 아니라는데도 자꾸 그러는구나.”
“혼자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방금 아빠가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희수는 은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니?”
“아니! 언니는 똑바로 들었고 아빠는 그렇게 말했어.”
은수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아빠! 혹시 또 누가 보이는 거야?”
“아니라니까! 빨리들 가 이제!”
만봉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 후로도 두 번 더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 번 더 버럭 소리를 지른 후 희수와 은수는 돌아갔다.
방문에 붙어 서서 귀를 바짝 붙이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후 만봉은 거실로 서둘러 나왔다. 다행히 대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형! 혼자 있기 지루했지? 내 딸들이 좀 별나서 말이야.”
“그런 딸들이 있는 네가 난 부러운데.”
“형도 참, 부럽긴 뭐가 부러워.”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해봐.”
대봉이 말했다.
“내가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죽을 계획!”
“참! 그랬지.”
만봉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죽는 게 가장 안전하게 죽는 걸까?”
“죽는데 안전한 게 있어?”
“아! 죽는 일은 안전한 일은 아니구나.”
만봉과 대봉은 나란히 앉아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꼭 죽어야만 해?”
대봉이 물었다.
“꼭 죽어야만 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변하지 않을 확고한 내 결심이야.”
만봉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서양에 어느 나라는 원하면 죽여주기도 한다던데.”
“여기는 그 나라가 아니잖아.”
“그렇지.”
만봉이 짧게 숨을 뱉었다.
“네가 생각하는 죽는 방법은 뭐가 있어.”
대봉이 묻자 만봉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음, 목매달아서 죽는 건 어때?”
“어디에 매달 건데?”
만봉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글쎄, 저기 등에 매달아 볼까?”
“그건 그다지 좋은 생각 같지 않아. 저 등이 네 무게를 못 견딜 것 같거든.”
“음, 그럼 욕실에 있는 수건걸이에 맬까?”
“그것도 역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수건걸이 높이가 네 키 보다 낮잖아.”
“그렇군, 역시 형은 똑똑하다니까, 그럼 어쩐담?”
만봉과 대봉은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럼 형이 칼로 날 찔러 줄래?”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내가 칼을 잡을 수가 없거든.”
“왜?”
“난 사실 네 눈에만 보이는 허상이야. 실체가 없어.”
“거짓말!”
“못 믿겠으면 칼을 가져와서 내 손에 쥐어줘 봐.”
만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에서 칼을 한 자루 들고 대봉에게로 돌아왔다.
“자! 잡아 봐!”
만봉이 대봉의 손에 칼을 쥐어주려고 했지만 칼은 대봉의 손을 통과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봤지?”
“정말이군, 그런데 어째서 난 형을 만질 수가 있는 거지?”
“음, 그건 아마 너와 내가 교감하기 때문일 거야.”
“교감?”
“그래, 감정을 교류한다는 뜻이야.”
“그럼 지난번에 우리 마누라 만났을 때는 왜 내가 손을 잡을 수가 없었지? 난 우리 마누라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데.”
“아마 그건 네 생각이고 네 마누라는 생각이 달랐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 마누라는 너와 교감하고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뜻이지.”
만봉의 눈이 갑자기 슬퍼졌다.
“역시 우리 마누라는 아직 나에 대한 화를 풀지 않았어.”
“언젠가 너를 이해하고 화를 풀 날이 오겠지, 그러니 힘을 내.”
만봉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까?”
“그건 차 운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럼 옥상으로 올라가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건 어때?”
“만약 네가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을 지나가던 고양이가 보게 된다면 그 고양이는 평생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야 할 텐데 그건 그 고양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럼 한강으로 가서 뛰어들까?”
“아마 물이 많이 차가울걸. 너무 차가워서 죽기로 한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그럼 대체 어떻게 죽어야 하는 거지?”
만봉의 시름이 깊어졌다.
“장인어른 오늘은 어떠셨어?”
넥타이를 풀며 민준이 물었다.
“뭐 늘 똑같지.”
“별다른 이야기는 안 하시고?”
“별다른 이야기?”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말하자면 치매증상 때문에 헛소리를 하신다든가.......”
민준은 곁눈으로 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헛소리는 잘 안 하시는데 자꾸 누굴 보는 모양이야.”
“누굴 보다니?”
“아빠가 앓는 치매의 특징이 환시를 본다는 거라는데 지난번에는 젊은 여자가 보인다고 하더니 자꾸 누가 옆에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해.”
“젊은 여자? 그럼 가끔 없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
“없는 사실?”
“아니, 뭐 있지도 않은 젊은 여자를 보기도 한다니까......”
민준이 말끝을 흐렸다. 희수는 민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신경과 박성현교수님 좀 만나봐. 대학교 선배라며.”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그래, 내가 한 번 만나볼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민준이 희수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민준의 말에 희수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보! 그래서 말인데 나 아빠 집에 당분간 가 있으면 안 될까?”
“장인어른 집에?”
“응. 우리 집으로 오자고 해도 듣지를 않으시니......”
“그렇게 하는 게 당신 맘이 편하겠어?”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미안해.”
“아니야, 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 당신이야 말로 몸도 잘 챙기면서 해.”
“고마워.”
민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