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이 형?”
만봉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남자의 목소리는 희미해지더니 어느새 코가 꽉 막힌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당신이야?”
소리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서 막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만봉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어깨를 웅크렸다. 그곳엔 어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마치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는 비염이 심한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런 여자가 많이 사랑스러운지 남자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만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훔쳐보았다. 부둥켜안고 있던 두 사람은 치매에 걸린 노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깊은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격정적인 소리가 지하 계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만봉은 늙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 앞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대낮에 젊은 사람들이 이 무슨 망측한 짓이요?”
만봉의 목소리에 놀란 남녀가 하던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만봉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얼어붙기는 만봉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장인어른?”
“강서방?”
놀란 여자는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만봉은 그 나이에, 더군다나 치매에 걸린 노인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빠른 동작으로 도망치려는 여자의 뒤 목덜미를 낚아챘다.
“아! 아파요.”
“네년은 누군데 감히 우리 사위랑 주둥이를 맞대고 있는 거냐?”
“할아버지! 주둥이라뇨!”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봉을 노려보았다.
“오호라! 네 년은 내 이름을 김영봉이라고 적었던 그년이구나.”
“장인어른!”
민준이 으르렁대는 만봉의 팔을 잡았다.
“아니 언제 봤다고 이년 저년이래?”
여자는 따질 듯 얼굴을 만봉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만봉은 그런 여자의 목에 걸려있던 사원증을 잡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성혜은! 그렇지. 내가 말했던가? 내가 왕년에 형사였다고. 비록 지금은 빌어먹을 치매에 걸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사람 이름과 얼굴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거든. 믿기 어렵겠지만 수십 년 전에 죽은 우리 형 얼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장인어른! 저랑 이야기하시죠.”
“어쩐지 네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안 좋더라니.”
만봉은 혜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민준은 그런 만봉을 끌어당기며 혜은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이씨! 짜증 나!”
혜은은 만봉에게 잡혔던 옷을 탁탁 털고 밖으로 나갔다. 혜은이 나가고 나자 민준은 만봉의 팔을 놓았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하던 작업을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짜증이 민준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자네! 저 여자랑 무슨 사이인가?”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냥 같은 병원 직원이잖습니까.”
“아무 사이가 아닌데 왜 서로 주둥이는 맞춰보고 있었나?”
만봉은 민준의 앞에 바짝 붙어 서서 턱을 쳐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널 한 대 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노려보았다.
“그건 장인어른이 잘못 보신 겁니다.”
민준이 만봉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말했다.
“자네도 지금 내가 치매라고 무시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장인어른도 아시잖아요. 아까 그 여자 장인어른 담당 간호사인 거.”
“알지.”
“지나다가 우연히 만나서 제가 잠깐만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뭐 그년 주둥이 크기가 갑자기 궁금하던가?”
민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
만봉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으라는 듯 턱을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장인어른의 상태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요.”
“내 상태?”
“네, 희수가 장인어른 걱정 때문에 통 밥도 못 먹고 힘들어해서 장인어른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봤습니다.”
“진짠가? 그런데 왜 주둥이는 맞대고 물어보나?”
“자꾸 주둥이 주둥이 하지 마십시오.”
“그럼 주둥이를 뭐라고 하나? 둘이 주둥이를 맞댄 건 사실이잖나.”
“아니라니까 그러십니다. 목소리가 잘 안 들려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만봉이 의심의 눈길로 민준을 노려보았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정말 믿어도 되겠나?”
“꼭 믿으셔야 합니다.”
만봉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민준을 쳐다본 후 말했다.
“그래, 내 상태가 어떻다고 말하던가? 그 성혜은년이.”
민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 방으로 가시죠.”
집으로 돌아온 희수는 쌓여있는 세탁물을 안아서 세탁실로 옮겼다. 그때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렸다. 희수는 식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강현철님 심장혈관과 예약 12월 8일 오전 10시」
희수는 캘린더를 열어서 날짜를 확인했다. 시아버지의 병원 예약이 내일이었다. 희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다시 세탁실로 들어갔다. 색깔별로 옷을 분류하던 희수는 세탁물을 그대로 바닥에 풀어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 깊은 곳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화가 났다.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화가 치솟아 머리를 데웠다. 화끈거리는 시선을 뒤죽박죽 섞여있는 세탁물에 떨어뜨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 붉어진 얼굴을 적셨다.
대체 자신은 지금 뭘 위해 살고 있는 건지, 이 답답한 길의 끝은 어디인지, 그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울음은 어느새 끅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을 누르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 외면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들자 눈물이 차갑게 식었다. 희수는 눈을 감고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휴대폰 영상통화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희수는 식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흘깃 본 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서현이었다. 서둘러 눈가를 닦아내고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딸!”
서현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꽉 들어찼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
“엄마는 세탁기 돌리려고 했지.”
화면 속에서 서현이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엄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 표정이 어때서?”
희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느라 이상한 표정이 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 눈이 많이 슬퍼 보여서.”
서현의 다정한 말에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려 했다. 희수는 그 울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아! 좀 전에 드라마를 봤는데 너무 슬퍼서.”
“드라마? 무슨 드라만데?”
“음, 제목이 뭐더라?”
“암튼 우리 엄마는 맘이 너무 여려서 문제라니까.”
“너는 별일 없는 거지?”
“응, 지금 한국인 친구 생일 파티가 있어서 거기에 왔어.”
“그래? 재미있겠구나. 그럼 재미있게 놀지 전화는 왜 했어?”
“그냥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엄마 별일 없는 거 맞지?”
“그럼! 아무 일 없이 엄마는 잘 지내니까 걱정 마!”
“알았어, 엄마! 그럼 다시 전화할게.”
화면 속 서현이 손을 흔들었다. 희수도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드는 순간 전화가 뚝 끊어졌다. 희수는 한 손을 휴대폰을 향해 어색하게 든 상태로 그대로 멈췄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표정 없이 멈춰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딸이 어디에선가 짠하고 나타나 자신을 위로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희수는 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희수는 어깨를 털썩 떨어뜨렸다. 목구멍에서 다시 ‘끅, 끅’하고 울음이 올라오더니 눈에서 뜨끈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만봉은 민준의 진료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척추 뼈 모형을 만지작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장인어른! 그거 그만 만지고 이리로 앉으세요.”
“이 뼈는 진짠가? 아니면 가짠가?”
“네?”
“진짜 사람 뼈냐 이 말이야.”
“그건 가짜 뼈입니다.”
“그럴 줄 알았네.”
“뭘 말입니까?”
“세상이 온통 가짜뿐이잖나.”
여전히 시선을 뼈 모형에 둔 채 만봉이 말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젊은 년이랑 주둥이 맞춰보는 자네의 말 같지 않은 변명도 가짜! 희수가 내게 치매 예방하는 거라며 줬던 약도 가짜!”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뭘?”
만봉이 민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랑 그런 사이 아니라구요.”
“참! 아니라고 말했지. 자꾸 오해해서 미안하네. 내가 요즘 정신이 깜빡깜빡한다네.”
“네, 뭐 그러실 수도 있죠.”
“그래 그 주둥이가 내가 치매가 확실하다고 하던가?”
질문을 하고 난 만봉은 늙은 나이에 앙상한 다리로 너무 오랜 시간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에 놓인 의자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털썩 앉았다.
“장인어른은 지금 치매가 확실합니다.”
“정말인가? 이렇게 정신이 말짱한데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시는 것만큼 정신이 말짱하시지 않습니다.”
“아닐세, 난 정말 말짱하다네.”
“아까도 그 간호사와 제 사이를 의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자네가 주둥이를........”
“치매로 인한 착각이십니다.”
민준이 만봉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그 말에 그대로 동작을 멈춘 만봉은 민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자네 생각보다 잔인하구만 그래.”
“제가 왜요?”
“자네 환자들 한테도 그렇게 정 없이 이야기 하나?”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아무리 사실이더라도 좀 더 친근하게 말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가령 ‘안타깝게도’라든가, 아니면 ‘애석하게도’라고 말일세.”
민준은 입을 닫고 삐죽인 후 말했다.
“의사는 무엇보다 사실을 전달하는 게 중요합니다.”
만봉은 입을 꾹 다물고 낮게 신음했다.
“희수가 그러는데 지금은 다행히 초기 단계라 약만 잘 드시면 괜찮다고 하더군요.”
“초기?”
“네, 초기!”
“치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초기이건 말기이건 그건 내게 별 의미가 없네.”
“왜 의미가 없습니까? 초기니까 약만 잘 드시면......”
만봉이 민준의 말을 자르고 멍한 눈으로 모형 뼈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지난번 희수랑 병원 왔을 때 의사가 치매 어쩌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
“그랬습니까?”
“그런데 희수가 나더러 절대 그런 병 아니라고 했거든. 그래서 난 그 말을 믿었어.”
“희수가 장인어른 상처받을까 봐 제대로 말을 못 했나 보더군요.”
만봉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는 지애미 닮아 착해빠져서 그럴 만도 하지.”
민준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말했던가? 나 왕년에 형사였다고.”
“네, 그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표창장도 여러 번 받으셨다면서요.”
“음, 잘 알고 있구만. 그래서 내가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얼굴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본다는 것도 알고 있나?”
“몰랐는데 아까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민준을 바라보는 만봉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실렸다.
“몰랐어? 자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한테 통 관심이 없군 그래.”
“죄송합니다.”
“뭐 앞으로 잘 알면 될 일이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네.”
“네, 잘 기억하겠습니다.”
“내가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하는데 솔직히 말귀는 잘 못 알아듣네. 요즘 들어 가끔 귀가 잘 안 들리거든. 그래서 의사가 분명히 치매라고 했을 텐데 제대로 못 알아들었어.”
만봉이 자책하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이참에 청력 검사도 받아보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보청기도 맞추고요.”
만봉은 두 손을 내저었다.
“곧 죽을 몸인데 보청기는 무슨........”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 아닌가?”
만봉은 민준이 정말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그렇긴 하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그 년 주둥이는 달던가?”
“장인어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부탁이니 제발 희수한테 괜한 말씀하지 마십시오.”
“왜? 희수한테 미안한가?”
“그런 게 아니라 희수가 그렇잖아도 요즘 지쳐 있는데 괜한 오해로 더 힘들어지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지, 우리 희수를 힘들게 할 수는 없지.”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사이 아닌 건 확실한 거지?”
“몇 번 말씀드립니까?”
“그럼 피차 우리 오늘 병원에서 만난 건 비밀로 하세. 사실 나도 희수 몰래 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