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민준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희수는 식탁을 차리다 말고 민준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뭐야?”
“오는 길에 예뻐 보이길래, 당신 꽃 좋아하잖아.”
“고마워.”
희수는 아무 감동 없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 꽃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민준이 그 모습을 흘깃 보았다.
“병에 안 꽂아?”
“응? 뭘?”
“꽃말이야!”
민준이 셔츠의 단추를 풀며 턱으로 식탁 위의 꽃을 가리켰다. 멍한 희수의 눈이 꽃으로 향했다.
“천천히 하면 되지 뭐.”
“당신 좀 이상해졌네, 예전엔 꽃 사다 주면 만사 제치고 병부터 찾아서 꽂고 좋아했었잖아.”
“내가 그랬었나? 글쎄, 나도 늙었나 봐, 좀 귀찮네.”
희수는 이런 꽃다발이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조금 전 깨달았다. 그저 세탁소에서 찾아온 세탁물이나 관리실에서 배부한 관리비 청구서와 별 다를 게 없었다.
희수는 시선을 민준에게로 돌려 민준이 벗은 셔츠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셔츠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더니 코를 묻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왜 그래?”
민준이 샤워를 하러 가려다 말고 물었다.
“당신 병원에서 샤워했어?”
“무슨 샤워를 해?”
“셔츠에서 비누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꽃을 안고 왔으니 꽃향기겠지.”
“그런가?”
금세 흥미를 잃은 희수는 셔츠를 세탁바구니로 던졌다.
“왜 당신 혼자 다 책임지려고 해?”
밥을 한입 크게 먹고 난 민준이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은수는 직장에 다녀서 바쁘니까.”
“아무리 직장에 다닌다고 해도 같은 딸인데.......”
“나 혼자 해도 괜찮아.”
“그럼 장인어른을 집으로 모시고 오는 건 어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빠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아.”
희수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장인어른도 참, 혼자 남은 그 집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당분간은 내가 매일 들여다보는 수밖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혼자 다 책임지려고 당신이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년에 장모님 돌아가시기 전에도 당신 몸이 많이 상했었잖아. 내가 처제 한 번 만나볼까?”
“아니야, 그러지 마!”
희수는 양손을 내저어 보였다. 민준이 짧게 숨을 뱉었다.
“당신이 고생이 많군. 필요하면 간병인을 쓰는 방법도 있으니 생각해 봐.”
“그래 고마워.”
희수를 빤히 보던 민준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여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응?”
“아무리 장인어른 때문에 당신이 힘들더라도 우리 부모님한테 소홀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치매환자를 돌보다 보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당장 어머니 내분비내과 가는 날이 언제야? 거의 날짜가 된 것 같은데.”
“응?”
희수는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열었다.
“어머! 내일모레네.”
“것 봐! 벌써 잊고 있잖아.”
희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민준이 일어나 희수의 옆으로 와서 어깨에 손을 올려 말없이 툭툭 두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희수는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걸 느꼈다.
만봉은 희수가 오기 전에 혼자 아침을 차려먹었다. 사실 그동안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오던 일이었다. 희수는 자신이 못 미더운 지 요즘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만봉은 그 모든 일이 귀찮게 느껴졌다.
밥을 먹고 난 후 만봉은 다시 약통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아침 약을 먹어야 하는 건지 저녁 약을 먹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만봉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약통 두 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예전부터 인생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는 이 방법을 주로 이용했었는데 대체적으로 결과가 좋았었다. 만봉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침을 가득 모아 왼쪽 손바닥에 퉤 하고 뱉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펴서 높게 쳐들었다. 그 손을 왼쪽 손바닥을 향해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 희수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희수의 목소리에 만봉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손바닥에 있던 흥건한 침이 식탁으로 흘렀다.
“또 왔냐?”
“뭐 하고 있었어?”
“응?”
만봉은 순간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손에는 그게 뭐야?”
만봉은 자신의 손바닥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웬 물이 이렇게......”
만봉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과 식탁 위에 떨어진 침을 닦아냈다.
“약은 먹었어?”
“약? 지금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밥은 먹었고?”
만봉은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배를 만져보았다. 납작해야 할 배가 봉긋이 나와 있었다.
“먹었지 그럼!”
희수는 아침이라고 써진 약통에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만봉에게 내밀었다. 만봉은 그 약을 받아서 삼키고 소파로 가서 누웠다. 그리고 눕자마자 곧 잠에 빠졌다.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는 만봉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잤다. 밥을 먹고도 잤고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잤다. TV를 보다가도 잤고 멀뚱히 창밖을 내다보다가도 잤다. 많이 졸리기도 했고 잠을 안 잔다고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봉이 잠이 든 사이 희수는 개수대에 쌓여있는 설거지를 끝내고 침대 정리를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희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하나를 털어서 다시 장 안으로 집어넣었다. 만봉이 깊이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봤고 반찬을 만들어 빈 통들을 채워 넣었다.
낮잠이라고 하기에는 과할 만큼 푹 자고 난 만봉이 눈을 떴다.
“넌 아직 안 갔냐?”
“이제 가야지, 참! 그런데 왜 베개가 하나 나와 있어?”
“베개?”
“응, 침대 위에 베개가 두 개 있던데?”
“아! 그거? 그건 지난밤에 형이.......”
말을 하려던 만봉은 입을 닫았다. 아주 오래전 죽은 형과 함께 잤다고 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형?”
희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형은 무슨?”
“아빠가 방금 형이라고 했잖아.”
만봉은 꼬치꼬치 캐묻는 희수에게 짜증이 났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넌 젊은 애가 귀를 먹은 게야? 아니면 치매라도 걸린 거야?”
“뭐?”
“왜 요즘은 젊은것들도 더러 치매에 걸린다잖아. 너도 방심하지 말고 조심해! 치매에 걸리면 끝이야.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기나 해?”
“갑자기 치매 얘기는 왜 해?”
희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을 해봐,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이냐? 그건 본인한테도 가족한테도 못할 짓이지. 암! 못할 짓이고 말고, 그러니 젊다고 자신하지 말고 너도 항상 조심해!”
희수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아빠! 우리 집에서 일주일만 살아보는 건 어때? 그때 가서도 아빠가 싫다고 하면 다시 집에 데려다줄게.”
“또 비싼 밥 먹고 신소리!”
“내가 아빠를 매일 들여다보는 것도 한계가 있어. 당장 내일은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 다녀와야 해.”
그렇게 말하는 희수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만봉은 미간에 잡고 있던 주름을 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희수를 보았다.
“내일 안사돈 병원에 가는 날이냐?”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많이 힘들겠구나.”
“맞아, 나 많이 힘들어. 그러니까 우리 집 가자!”
희수가 두 손으로 만봉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만봉이 그 손을 뿌리쳤다.
“앞으로 나한테는 오지 마!”
“뭐?”
“난 혼자서도 잘하니까 오지 말라고.”
“아빠가 뭘 혼자서도 잘하는데?”
희수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혼자서 뭘 잘하냐니? 넌 그게 아빠한테 할 소리냐? 내가 못하는 게 뭐가 있어? 밥을 못 챙겨 먹길 해? 아니면 혼자 화장실을 못 가? 게다가 난 혼자가 아냐. 형이......”
말을 하려던 만봉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아까부터 자꾸 형 이래? 또 누가 보이는 거야?”
“보이긴 누가 보인다고 그래! 헛소리 집어치우고 이제 그만 돌아가!”
만봉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TV의 소리를 올렸다. 희수는 그런 만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봉은 희수를 한 번 흘금거린 후 TV에 집중했다.
"아빠 얼굴 구멍 나겠다, 그만 좀 쳐다봐!"
만봉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빠는 TV가 재미있어?”
“누가 재미있대? 그냥 보는 거지. TV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가거든.”
“아빠는 시간이 잘 가는 게 좋아?”
“좋지 그럼!”
“나이도 많은데 시간이 잘 가는 게 뭐가 좋아?”
“심심하니까.”
“심심해?”
“그래, 심심하다. 사는 게 너무 심심하고 지루해.”
만봉이 말을 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TV를 보고 있는 만봉의 눈동자가 공허했다. 그런 만봉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너 가기 전에 지난번에 TV 보던 것 좀 틀어놓고 가.”
“지난번에 뭐?”
“아 왜, 그 잘생긴 사람들 나와서 밥 먹는 거 말이야.”
“그게 뭐야?”
희수는 만봉에게서 리모컨을 받아 들고 채널을 돌렸다.
“아! 거기! 거기에 내버려 둬.”
옆에서 만봉이 소리쳤다. 희수는 화면을 보았다. 남자들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왜? 이게 재미있어?”
“그래, 재미있어.”
희수는 만봉을 보았다. 눈이 커진 만봉의 입가에는 미소까지 지어졌다.
“사는 것 같잖아.”
“뭐가? 밥 먹는 게?”
“그냥 밥 먹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맛있게 밥 먹는 게.”
만봉은 말을 하며 TV앞에 바짝 다가가 앉아 고개를 쭉 빼고 입을 헤벌쭉 벌렸다. 희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만봉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내일은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 다녀와서 점심때 올게.”
“오지 말라니까!”
만봉은 시선을 TV에 못 박은 채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
다음날 아침 일찍 은수가 만봉의 집으로 들어섰다. 만봉은 TV를 켜둔 채 소파에서 잠들어있었다.
“아빠!”
은수는 잠들어있는 만봉을 흔들어 깨웠다. 만봉은 화들짝 놀라서 깨며 동그란 눈으로 은수를 보았다.
“누구, 누구야!”
“누구긴! 아빠 둘째 딸이지.”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
“언니가 오늘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간다고 해서 내가 출근하기 전에 잠깐 들렀어.”
“바쁜데 쓸데없이 뭐 하러 와!”
만봉이 일어나 앉으며 입가를 적시고 있는 침을 닦아냈다.
“아빠가 자식들 말도 안 듣고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들잖아.”
“그러니까 힘든데 넌 출근이나 할 것이지 뭐 하러 왔냐고! 아침 먹고 있으면 희수가 올 텐데.”
“언니도 힘들어. 시부모님 병원 모시고 다녀야지, 매일 아빠 집 왔다 갔다 해야지.”
은수는 주방으로 가서 식탁을 차리며 잔소리하듯 말했다.
“왜? 희수가 나 때문에 힘들대냐?”
만봉이 은수를 보며 물었다.
“아빠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언니 요즘 얼굴 상한 거 안 보여?”
만봉은 은수의 말에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맞아, 요즘 희수 얼굴이 많이 야위긴 했어.”
“아빠 속상하라고 한 말은 아니야. 언니가 그만큼 힘드니까 아빠도 언니 말 좀 들으라고.”
은수가 만봉의 어두워진 표정을 흘깃 보고 말했다.
“희수는 내가 그만 오라고 했는데 말도 안 듣고 자꾸 오는 거야.”
“아빠를 혼자 두고 언니가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어?”
“난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니들은 대체 뭐가 걱정이 된다고 다들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만봉은 답답한 마음에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뭘 할 줄 알고 뭘 할 줄 모르는지 잘 몰라. 아빠도 그래.”
“뭐라고?”
“아빠는 아빠를 잘 모른다고.”
“내가 나를 왜 몰라? 넌 날 꼭 치매환자처럼 취급하는구나.”
“그럼 치매환자를 어떻게 취급해야 해?”
은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만봉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대체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 말은 내가 뭐 치매라도 걸렸다는 말이냐?”
“아빠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야?”
“뭘 말이냐?”
“아빠 치매인 거 정말 모르냐고!”
순간 만봉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너 제정신이야? 내가 무슨 치매라고 그래?”
만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치매 맞다니까!"
"내가 어째서 치매야? 이렇게 정신이 멀쩡한데? 그리고 난 혼자 뭐든 다 잘할 수 있어. 네들이 괜히 호들갑 떠는 거야."
은수는 만봉을 빤히 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가 혼자 뭘 제대로 할 수 있는데? 밥은 할 수 있어? 청소는? 아니면 빨래는 제대로 할 수 있어? 그리고 언니 말 들으니 아빠 가끔 헛것도 본다며? 그럼 주로 뭘 보는데? 돌아가신 엄마도 봐? 그게 아빠는 정상이라고 생각해?”
그 순간 은수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만봉은 오른손을 들어 은수의 뺨을 내리쳤다. 은수의 뺨이 금세 붉게 부풀어 올랐다. 놀란 은수가 뺨을 감싸 쥐고 만봉을 노려보았다.
“아빠!”
“너 언제 내가 집에 오라고 했어?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는 헛소리야!”
만봉이 상기된 표정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은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헛소리 아니야.”
“내가 치매라는 게 왜 헛소리가 아냐!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넌 내가 치매라도 걸렸으면 좋겠냐? 이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제발 이제 좀 받아들여. 아빠는 치매야! 아빠가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해도 분명한 치매라고!”
은수는 만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만봉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릅뜬 눈에 굵은 눈물이 고였다. 굽은 어깨가 더 안으로 말려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며 의자를 잡았다.
“말도 안 돼! 정말 내가 치매라는 거냐?”
“그렇다니까!”
은수가 힘주어 말했다.
“희수는 그렇게 말 안 했는데?”
“언니는 맘이 약해서 그런 말 못 해.”
은수는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 식탁을 차리며 말했다. 의자를 잡은 만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얼른 밥 먹어. 그리고 약도 먹고. 나 정말 바쁘다니까!”
“알았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넌 그만 가봐라.”
은수는 물끄러미 만봉을 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놀란 듯 상기된 만봉의 표정을 보며 치매라는 말은 괜히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약 꼭 챙겨 먹어!”
만봉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은수는 빠르게 겉옷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만봉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만봉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내가 치매라니, 말도 안 돼!”
그때 안방에서 남자아이, 일명 대봉이 밖으로 나왔다. 대봉은 만봉의 맞은편에 앉았다.
“형! 방금 은수년이 하는 말 들었어? 그년이 나더러 치매라고 하는군.”
만봉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봉을 보았다. 대봉이 슬픈 눈으로 만봉을 보았다.
“이렇게 멀쩡한데 어떻게 치매일 수가 있지? 은수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해서 한숨을 내쉰 탓에 몸은 쪼그라들다 못해 식탁의자에 붙을 지경이 됐다.
“우리 마누라가 죽기 전까지 신신 당부했던 게 치매에 걸려 자식들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였어.”
대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봉이 갑자기 몸을 쭉 펴고 오른손을 들어 뒤통수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그 손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뒤통수를 딱딱 때리기 시작했다. 놀란 대봉이 일어나 만봉의 손을 잡았다.
“이깟 운동도 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만봉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만봉은 때리기를 멈추고 어린 대봉에게로 몸을 기댔다. 대봉은 작은 손으로 만봉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 이제 어쩌지?”
만봉이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현관 안으로 들어오더니 만봉의 맞은편에 앉았다. 만봉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았다. 눈에 고인 눈물을 소맷부리로 닦고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자를 뚫어지게 보던 만봉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당신이야?”
“.......”
“당신 맞구나!”
만봉의 흐느낌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날 두고 혼자 죽었으면 그만이지 여기는 왜 다시 왔어?”
여자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만봉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
만봉은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 뻔히 있는 여자의 손이 잡히지 않았다. 만봉은 몇 번 더 허우적대다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만봉은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 죽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는데 못했던 말이야.”
만봉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미안했어. 당신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당신이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을 엎어서 미안했어. 젊은 시절 철없이 바람피웠던 것도 미안했고, 그리고 음....... 그리고 당신 때린 거 정말 미안했어. 아! 그런데 내가 당신 때린 건 맞아? 난 때린 기억이 없는데 당신이 자꾸 맞았다고 해서....... 하긴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아무튼 전부 다 미안했어.”
만봉은 고개를 슬쩍 들어 다시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날 남편으로 만나게 해서 미안했고 병들게 하고 나보다 먼저 죽게 해서 미안했어.”
할 말을 다했다고 생각한 만봉은 여자를 빤히 보았다. 여자는 만봉을 바라만 볼뿐 말이 없었다.
“당신도 형처럼 말할 줄 몰라?”
“........”
“왜 죄다 그 모양이야?”
앞에 앉아있는 여자도 옆에 서 있는 대봉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젠장 할........”
만봉은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다가 여자에게 말했다.
“나 당신한테 따질 일도 있어!”
만봉이 몸을 쭉 폈다.
“당신이 머리를 많이 자극해 주면 치매에 안 걸린다며. 그런데 이게 뭐야! 머리가 띵해지도록 때리고 또 때렸는데 결국 그 빌어먹을 치매에 걸리고 말았어. 은수년이 나더러 치매라더군. 당신 이제 어쩔 거야! 당신이 책임져! 당신 말만 믿은 내가 바보였어.”
만봉은 머리를 식탁에 처박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형! 여보! 다들 어디 간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만봉의 눈에 ‘아침’이라고 써진 약통이 눈에 들어왔다. 만봉은 손을 뻗어 약통을 쥐었다.
“희수년! 치매에 절대 걸리지 않게 해주는 약이라고 내게 거짓말을 했어.”
만봉은 약통을 손에 쥔 채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신발장을 열어 연장통에 들어있던 망치를 꺼냈다. 손에 들고 있던 약통을 노려보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망치로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에잇, 빌어먹을 치매에 걸린 영감탱이 얼마나 살겠다고 이런 약을 먹어!”
플라스틱으로 된 약통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안에 들어있던 약들도 모두 가루로 변했다. 모두 부수고 난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멈추지 않고 망치를 휘둘러댔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 만봉은 망치를 내던지고 현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죽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