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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Aug 11. 2023

아이

“너 누구냐?”

놀란 만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핏기 하나 없이 얼굴이 하얀 아이는 까만 눈으로 만봉을 빤히 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만봉은 소파에서 일어나 아이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너 누군데 내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아이는 만봉을 빤히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만봉은 아이 앞에 쪼그리고 마주 앉았다.

“너 집이 어디야? 엄마는 없어?”

“.........”

“엄마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럼 나랑 같이 살래?”

“.........”

“녀석!  어른이 묻는데 왜 말을 안 해!”

만봉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아이는 여전히 만봉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너 말할 줄 몰라?”

만봉은 고개를 기울여 아이에게 대답을 기다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사실 나도 말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해.”     



은수는 만봉의 검사 결과를 전해 듣고 퇴근 후에 남편 준석과 함께 부랴부랴 희수의 집으로 달려왔다.

“아빠가 치매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어딜 봐서 치매야?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아빠는 누구보다도 멀쩡하다고.”

식탁의자에 앉아서 은수가 말했다. 

“증상이 심각한 겁니까?”

은수 옆에 앉은 준석이 물었다.

“아직 초기라 약만 잘 드시면 당분간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지만 그게 언제까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렇게 혼자 계셔도 되는 거야?”

은수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준석이 은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그럼 장인어른 우리가 모시는 건 어때?”

“우리가?”

“그래, 처형은 작년에 장모님 돌아가실 때도 고생 많이 하셨잖아.”

준석의 말에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야 싶지, 하지만 우리 집에 모시면 누가 케어할 건데? 아무튼 당신은 대책 없이 너무 착하기만 해서 탈이라니까.”

“됐어! 어차피 아빠는 그 누구 집에도 안 가실 거야. 당분간 내가 매일 드나들 테니 너도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뵙도록 해! 전화도 자주 드리고.”

“그럼 간병인을 들이는 건 어때?”

오른쪽 검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은수가 말했다.

“그건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자.”

희수가 그늘이 진 얼굴로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건 그렇고 형부는 퇴근이 늦나 봐?”

은수가 물었다.

“응, 오늘 밤에 응급수술이 있다고 했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난 만봉은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깜깜해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만봉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길게 한숨을 뱉었다. 앙상한 다리를 침대 밖으로 옮기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6년 전 닳아빠진 자신의 관절을 빼내고 인공 관절을 장착한 양쪽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허리를 쭉 편 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탓에 만봉은 눈을 찌푸렸다. 어디에선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잠시 눈이 빛에 적응하기를 기다려 시계를 들여다보니 2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만봉은 멍하니 그대로 서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새벽 2시에 잠에서 깼을 때 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윙하는 소리가 또 머릿속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만봉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두 번 탁탁 친 후 침대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환하게 켜진 화면 속에서 젊은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 너무 많아.”

만봉은 중얼거리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여기저기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과 저녁을 함께 먹었던 그 듬직한 남자들이 보고 싶어졌다. 빠르게 채널을 돌려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남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하던 만봉은 새벽 두 시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실례가 되는 일인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다지 큰 실례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게 희수라면 말이다. 만봉은 휴대폰을 열어 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발신음 끝에 희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빠?”

“희수야! 낮에 네가 틀었던 TV가 몇 번이냐?”

“뭐?”

“네가 아까 내 집에서 틀었던 방송이 몇 번이냐고!”

“나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건 왜?”

“너는 나이도 젊은것이 왜 그렇게도 기억력이 안 좋은 게냐?”

수화기 너머로 희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지금 아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지금 갈까?”

“됐어. 에잇!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만봉은 투덜대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말만 너무 많은 게 아니라 기억력도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채널을 돌리다가 동물들이 나오는 화면에 멈추어 두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벌판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기린을 보며 나도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는 저렇게 펄펄 뛰어다녔었는데라고 생각했다. 

지난날을 생각하던 그때 불현듯 낮에 집안으로 들어왔던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만봉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이가 앉아있었던 자리에 아이는 없었다.

“녀석! 내가 한마디 했다고 뿔이 나서 가버렸군. 머리를 쥐어박지는 말 걸 그랬어.”

만봉은 다시 소파로 나와 벌러덩 누웠다.     


한편 전화를 끊은 희수는 휴대폰 화면의 시계를 보았다. 2시 30분이었다. 대체 아빠는 지금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뭘 한단 말인가. 희수는 짧게 숨을 내뱉고, 통화하는 소리에 혹시 민준이 깨지는 않았는지 옆을 돌아보았다. 민준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었다. 지난밤에 응급 수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당연히 늦게라도 왔을 줄 알았다. 희수는 거실로 나와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들어 민준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수술 끝에 곤히 자고 있는데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메시지를 남겼다.

-안 들어왔네? 수술이 늦게 끝난 거야?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아침에 가져다줄게.

메시지를 남기고 희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이 시간에 혼자 깨어있을 만봉이 걱정이 돼 다시 잠을 잘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동차 키를 챙겨 들고 만봉에게로 향했다.          

20여분이 걸려 도착해 집안으로 들어서자 환하게 불이 켜진 집안에서 만봉은 양손에 약통을 들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빠! 뭐 해?”

“왔냐? 어떤 약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약을 왜 먹어? 아직 한밤중인데 잠을 자야지!”

“해가 중천에 떴는데 무슨 잠을 자?”

만봉은 턱으로 어두운 창을 한 번 가리키고 다시 약통을 살폈다. 그런 만봉의 모습이 낯설어 희수는 코끝이 찡해졌다.

“고민을 왜 해? 여기 아침이라고 써진 걸 먹어야지!”

희수는 만봉의 오른손에 있던 약통을 뺏어서 흔들어 보이고 다시 손에 쥐어줬다.

“응, 맞아, 아침! 그렇잖아도 나도 지금 막 그걸 먹으려던 참이었다.”

“아빠! 나 졸리니까 조금만 자고 이따가 약 먹자.”

희수가 만봉의 팔짱을 꼈다.

“넌 나이도 젊은것이 왜 그리 잠이 많은 게냐?”

“그러게 말야, 아빠도 조금만 더 자! 내가 이따가 밥 맛있게 해 줄게.”

만봉은 그런 희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그러자면 그러지 뭐.”

만봉은 약통을 식탁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봉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희수는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만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 강력계 형사를 했을 만큼 날래고 영민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저 늙고 초라한 병든 노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옛날 덩치 좋던 몸은 세월과 함께 수분과 지방이 모두 빠져나간 듯 마르고 구부러져 있었다. 희수는 그런 만봉이 안쓰러워 잠든 아빠의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어느덧 편안해진 듯 만봉의 코 고는 소리가 한층 깊어졌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난 아침에 민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 수술 늦게 끝나고 잠깐 누워 있는다는 게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었어. 연락 못해서 미안해.

희수는 답장을 보냈다.

-많이 피곤했겠네, 고생했어요. 뭐 필요한 건 없어?

-없어. 오늘은 일찍 퇴근할 것 같아. 같이 저녁 먹자.     


설득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희수는 다시 만봉에게 말했다.

“아빠! 우리 집 가서 같이 살자. 응? 내 소원이야.”

“넌 먹히지도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자꾸 떠드는 거야. 귀 아프게!”

만봉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희수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네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머지않아 내가 치매에 걸리고 말 것 같구나.”

만봉은 희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희수는 만봉을 빤히 보았다. 

만봉은 대체적으로 멀쩡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 밥을 지어먹는 일도 잘했고 빨래도 청소도 잘했다. 부지런히 쓸고 닦아서 집은 엄마가 살아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을 만큼 깨끗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무엇 하나 먼저 부탁하는 일이 없었고 찾아오는 자식은 귀찮다며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잘하던 일에 실수가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밥솥의 취사버튼 누르는 걸 잊어버려 생쌀을 마주하는 일이 늘어났고 다림질을 하다가 손을 데서 희수가 다리미를 치워버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없는 방 한 곳을 가리키며 쥐가 있다고 쥐를 잡아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했고 천장에 새까만 벌레들이 잔뜩 붙어있다고 몸서리치기도 했다. 희수는 왜 그런 것들이 만봉의 눈에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젠 정말 만봉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도움을 거절만 하는 만봉이 희수는 안타까웠다. 

“저녁에 꼭 약 챙겨 먹어, 알았지?”

대답 없는 만봉을 향해 다시 한번 당부를 하고 희수는 돌아갔다.


희수가 돌아가자 만봉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만봉은 손으로 배를 만져보았다. 배가 소파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납작했다. 하지만 만사가 다 귀찮은 만봉은 밥 먹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있었다. TV는 혼자서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만봉은 TV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들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한국말일까 중국말일까 생각하던 만봉은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만봉은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나 앉아서 잠시 멍하게 있다가 창을 보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삐걱대는 허리를 달래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세상이 빙글 돌았다. 만봉은 잠시 벽을 잡고 어지럼증이 멈추길 기다렸다. 

“젠장! 밥을 먹을 걸 그랬지.”

잠시 후 안정이 되자 거실에 불을 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다시 소파에 앉으려는데 베란다에서 어제의 남자아이가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너 거기 있었던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어제처럼 안방으로 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난 네가 화가 나서 가버린 줄 알았다.”

만봉은 반가운 마음에 아이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제 꿀밤 때린 건 미안하구나, 사과하마!”

만봉을 빤히 보던 아이가 씩 하고 웃었다.

“녀석! 웃을 줄도 아는구나!”

“.........”

“너 몇 살이야? 이름은 뭐고?”

“.........”

“또 말을 안 하네! 너 말할 줄 몰라?”

“........”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만봉은 다시 주먹을 꽉 쥐고 아이의 머리 위로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아이의 눈이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봉은 들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미안하구나, 또 때리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한 표정으로 아이를 빤히 보던 만봉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쓱 들이밀어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만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대봉이 형?”

만봉의 고개가 옆으로 기운 만큼 아이의 얼굴도 기울었다.

“맞지? 대봉이 형!”

만봉은 흥분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벅찬 감동에 빠져 아이의 양 어깨를 잡고 얼굴을 빤히 보던 만봉은 아이를 덥석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형 맞구나! 그동안 내가 형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한 줄 알아?”

아이는 그대로 만봉에게 안겨있었다. 한참을 흐느껴 울고 난 만봉이 아이를 놓아주었다. 만봉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자세히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봉을 보았다.

“형! 대체 어떻게 여길 온 거야? 혹시 날 보러 온 거야?”

“.........”

“그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눈물을 닦아 낸 만봉의 눈에 금세 다시 눈물이 고였다. 

“형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글썽이는 눈으로 한참 아이를 바라보던 만봉은 잡고 있던 아이의 어깨를 놓아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 형이 그렇게 죽고 난 후에 우리 집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어. 엄마는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지. 형이 강에 빠진 걸 건져내지 못한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엄마는 늘 자책했어.”

만봉은 오래전 일이 떠오르는 듯 슬픈 표정으로 시선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엄마가 울면 나도 따라서 울었어. 그때는 형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엄마가 우는 게 더 슬펐어. 난 엄마가 울다가 형처럼 죽을까 봐 무서워서 엄마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같이 울었지. 그렇게 엄마와 내가 울면 아버지는 제발 그만 좀 울라며 이놈의 집구석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가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당 한 구석에서 아버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걸 봤어. 내색은 안 했지만 아버지도 형이 보고 싶었던 거야. 난 그날 엄마 말을 안 듣고 강으로 수영을 갔던 형을 원망했어. 우리 가족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된 게 다 형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 아! 그렇다고 내가 형을 원망만 했던 건 아니야. 나도 사실 형이 많이 그리웠어.”

만봉은 말을 하며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이 흘러 그렇게 울기만 하던 엄마도 죽었고, 아! 엄마가 형 때문에 울다가 죽은 건 아니야. 염려와 달리 생각보다는 오래 사셨어. 그리고 이놈의 집구석이라고 문을 걷어차던 아버지도 죽었어. 어디 그뿐이야? 내 나이가 벌써......”

만봉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몇 살이더라?”

아이는 그런 만봉을 빤히 보았다.

“형! 내가 몇 살이지?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만봉은 오른손으로 턱을 쓸었다.

“50살은 분명히 넘었어, 그리고 60살도 넘은 것 같아. 왜냐하면 환갑이라고 애들이 파리 여행을 보내줬었거든, 아! 스페인이었던가?”

만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처음 비행기를 타던 그날 얼마나 심장이 벌렁거렸던지, 하마터면 기사양반한테 비행기 좀 세워달라고 소리칠 뻔했다니까.”

만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서리를 쳤다. 마치 지금 막 이륙하는 비행기에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면 내가 몇 살인 거지? 설마 70살도 넘은 건 아니겠지? 도대체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당황한 만봉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탁탁 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던 만봉이 손바닥을 뒤통수에 댄 채 자기를 빤히 보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아! 이거? 이게 치매를 예방하는 운동 같은 건데, 우리 마누라가 나한테 가르쳐준 거야.”

만봉이 말을 하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숨이 빠져나간 만큼 몸도 쪼그라들었다.

“우리 마누라는 작년에 죽었어. 담배도 피우지 않는 여자였는데 폐암이라지 뭐야!”

아이의 눈이 슬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때문이야. 내가 속을 많이 썩였거든.”

만봉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고 그로 인해 쪼그라들었던 몸이 조금 더 쪼그라들었다. 아이의 까만 눈이 만봉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밥상은 던지지 말 걸 그랬어.”

“........”

“바람도 피우지 말았어야 했고, 아! 때리지도 말았어야 했어. 솔직히 좀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사실 난 마누라를 때린 기억이 없어, 그런데 마누라가 자꾸 나한테 맞았다고 하더군.”

“.......”

“맞아, 내 성질 받아주느라 마누라 폐가 까맣게 병들었어.”

만봉은 숨을 크게 들이마셔 쪼그라들었던 몸을 쭉 폈다.

“마누라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를 하고 갔어. 치매에 걸려서 아이들 힘들게 하지 말라고! 머리를 끊임없이 자극해 주라고 했어. 그래서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는 거야.”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형도 따라 해 봐! 정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라니까.”

“........”

“내 인생에 남은 마지막 소원이 뭔 줄 알아? 바로 죽을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는 거야.”

만봉은 어깨를 쭉 펴고 자랑스럽게 아이를 보았다.

“다행히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한 덕분에 지금까지 치매에는 걸리지 않았어.”

그러니 나를 칭찬해 줘야 한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아이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은 정말 말을 못 해?”

“.........”

“그래, 하지 마! 말 좀 못하면 어때? 이렇게 날 만나러 와 줬으니 됐어.”

만봉은 다시 한번 감동받은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형! 오늘은 어디 숨지 말고 나랑 같이 자자! 아니, 앞으로 쭉 나랑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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