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는 밤늦게 만봉의 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는 낮에 버려두고 갔던 캐리어가 그대로 있었다. 희수는 캐리어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만봉을 집에서 돌보기로 한 일이 정말 잘하는 일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만봉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삐그덕 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봉을 당장 요양병원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캐리어 위에 앉아있던 희수가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에 TV가 혼자 떠들고 있었다.
“아빠!”
희수가 큰 목소리로 만 봉을 불렀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놀란 희수는 캐리어를 현관에 두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어디 있어?”
희수는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 만봉을 찾았다. 어디에도 만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희수는 서둘러 욕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욕실 안에서 만봉이 속옷 차림으로 바지를 세면대에 담근 채 주무르고 있었다.
“아빠 지금 뭐 해?”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만봉이 토끼눈을 하고 희수를 돌아보았다.
“너 다시는 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또 왜 왔어?”
말을 하며 만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지를 뒤로 감췄다.
“바지는 왜 빨고 있어?”
“너는 왜 그렇게 아빠 말을 안 듣는 게냐? 집에 가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 혹시 오줌 쌌어?”
“내가 애냐? 무슨 오줌을 싸!”
만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왜 바지를 빨고 있어?”
“에이 씨!”
당황한 만봉은 손에 들고 있던 바지를 욕실 바닥에 패대기치듯 던지고 희수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희수는 가까이 다가가 세면대에 고인 물을 들여다보았다. 노르스름한 물이 하얀 세면대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희수는 무너지는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싸늘한 감각이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로 쭉 뻗쳤다. 한참을 있다가 눈을 뜬 희수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주워 들고 세면대에서 빨기 시작했다. 노르스름한 세면대의 물 위로 투명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대체 수면제는 언제 가져다줄 건가?”
만봉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틀 후면 마련할 수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준석이 말했다. 만봉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현관 쪽을 흘깃흘깃 살피며 말했다.
“아무튼 시간을 그리 넉넉하게는 못주네. 빨리 구해오도록 하게.”
“며칠 안에 가겠습니다. 대신 제가 수면제 가져가는 날 주시기로 한 3억은 확실히 주시는 겁니다.”
“난 누구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은 아니네.”
“누구처럼 이라뇨?”
“강서방 말일세.”
만봉이 힘을 주어 말했다.
“형님이요?”
“자네도 알고 있나? 강서방 바람피우는 거?”
“그건 형님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장인어른이 오해하시는 거라고.”
“강서방이 거짓말을 하는 거네.”
“거짓말 같지는 않던데요.”
“자네가 그것도 한 번 알아봐 주겠나?”
“뭘 말입니까?”
“강서방이 성혜은이랑 확실히 헤어졌는지 말일세. 내가 몇 번이나 전화해서 경고했는데 계속 거짓말만 하네.”
“형님한테 전화했었습니까?”
“그래,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이제 내 전화는 받지도 않네, 그러니 자네가 한 번 알아봐 주게.”
“제가 그걸 어떻게요?”
“자네 어차피 직장도 안 다녀서 시간이 많은 거 아닌가?”
준석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직장을 안 다닌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번 자네가 도둑고양이처럼 우리 집에 왔을 때 알아봤네. 그날 자네한테서는 직장인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더군.”
“네.”
가끔 만봉이 저렇게 이야기할 때는 형사 앞에서 취조당하고 있는 범인이 된 기분이 들어 오금이 저리곤 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돈이 필요한 건가? 설마 자네도 바람피우는 건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럼 주식했나?”
준석은 말이 없었다.
“그랬군 그래. 내가 왕년에 형사를 오래 해서 눈치는 빠르다네.”
“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자네는 절대 바람은 피우지 말게.”
“제가 은수를 두고 어떻게 바람을 피웁니까!”
“자네는 현명하구만, 내가 젊었을 적에 다 해봐서 아는데 바람을 피운다는 건 같이 사는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사는 내내 두고두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일이라네.”
“네.”
“그러니 절대 후회할 일 하지 말란 말일세.”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마트에 갔던 희수가 돌아왔다. 당황한 만봉은 그대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아빠 뭐 하고 있었어?”
“하긴 뭘 해!”
한편 찜질방 휴게실에서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준석의 앞을 덩치가 큰 남자 세 명이 둘러쌌다. 놀란 준석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하! 이 쥐새끼 같은 놈! 네가 어디로 숨든지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멍청하게 허튼짓할 생각 따위는 집어치워!”
“허튼짓 안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조폭임을 알 수 있는 헤어스타일에 왁스를 떡칠 한 남자가 준석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멱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돈은 어떻게 됐어?”
“다음 주! 다음 주면 확실히 마련됩니다.”
“정말이야? 그 말은 어떻게 믿지?”
“다음 주까지 돈을 마련 못하면 절 죽여도 좋습니다.”
그때 떡칠한 왁스의 손바닥이 준석의 뒤통수로 차지게 날아들었다.
“이 새끼 바보야? 너처럼 하찮은 놈을 죽이긴 왜 죽여? 그럼 돈은 누구한테 받으라고!”
“그만큼 믿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얌전히 무릎을 꿇은 준석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턱 아래에 두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떡칠한 왁스를 올려다봤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행여나 어디 가서 목 매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네가 우리 허락도 없이 죽기라도 하면 그다음은 네 마누라, 그리고 네 자식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만 명심해! 아! 네 마누라 이름이 김은수던가? 너랑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예쁘더군.”
떡칠한 왁스가 느끼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준석은 턱을 딱딱 부딪치며 떨기 시작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분명히 다음 주에 돈 마련해서 찾아가겠습니다.”
“네 말을 들어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명심해!”
준석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희수의 눈을 피해 만봉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 만봉의 곁에 대봉이 앉았다.
“형! 다음 주에 우리 둘째 사위가 수면제를 가지고 오기로 했어.”
“정말 그 수면제를 먹을 생각이야?”
“응, 형도 우리 희수 얼굴 봤지? 젊은것이 얼마나 힘이 들면 얼굴이 죽은 나무껍질 색깔이잖아.”
“그렇긴 한데 네가 죽고 나면 희수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글쎄.”
만봉은 한 손으로 팔베개를 하고 대봉을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가족이 죽는다는 건 무엇보다 슬픈 일이라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대봉이 말했다.
“그렇지, 그런 거라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지. 난 이미 내 가족을 음.......”
만봉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형 죽었지, 엄마 죽었지, 아버지 죽었지, 음, 그리고 작년에 우리 마누라까지, 그럼 대체 몇 명이야?”
만봉은 접던 손가락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을 접는 중이었는지, 펴는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몇 명인지 세기를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아무튼 정말 힘든 일이었어.”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네가 죽고 나면 희수는 어떨 것 같아?”
“뭐 처음에는 좀 슬프겠지, 하지만 곧 잊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랬던 것처럼?”
“음.......”
만봉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형한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형이 죽었을 때 생각보다는 빨리 잊었어. 아! 그게 전혀 안 슬펐다는 뜻은 아니야.”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좀 더 많이 슬펐어.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나도 어른이었고 또 내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지.”
“그래서?”
“애써서 잊고 내 가족을 돌봐야 했어.”
“그랬구나!”
“그런데 우리 마누라는 좀 달랐어.”
“어떻게?”
말을 하려던 만봉이 텅 빈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죽은 마누라가 서 있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만봉의 텅 빈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베개를 적셨다. 만봉은 소매를 들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훔쳐내고 코에서 흐르는 콧물은 힘껏 안으로 들이켜 꿀꺽 삼켰다.
“우리 마누라가 죽었을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졌어. 세상이 끝난 것 같았지. 그래서 나도 바로 따라가려고 했어.”
만봉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왜 안 따라갔어?”
“마누라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의 감시가 심해졌거든.”
“감시라니?”
“내가 따라 죽으려고 한 걸 눈치라도 챘던 건지 잠시도 내게 죽을 기회를 주지 않았어. 특히 희수가.”
“그런데 지금은 괜찮겠어?”
“응, 마누라가 죽고 일 년 정도 지나니까 나에 대한 감시가 조금 소홀해진 것 같아. 이 영감이 마누라를 따라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한 거겠지.”
“내 생각에는 전혀 소홀해진 것 같지 않은데?”
만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가 얼마 전에 빌어먹을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그때 밖에서 만봉을 부르며 방으로 다가오는 희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빠!”
그 소리에 만봉은 똑바로 누워 잠이든 척 눈을 감았다. 희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주무세요? 방금 누구랑 무슨 이야기한 것 같은데?”
만봉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과장되게 기지개를 켰다.
“잘 자고 있는데 내가 누구랑 무슨 말을 했다는 거냐?”
“아빠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네가 잘못 들은 거야.”
“그런가? 아무튼 일어나서 저녁 드세요.”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한 은수는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준석의 서재를 청소하던 중 책꽂이 높은 곳 한 구석에서 의심스러운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의아한 생각으로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열어보니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병 안에 하얀 알약이 가득 들어있었다. 병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내용물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준석이 들어왔다. 은수는 약병을 손에 든 채 밖으로 나갔다.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집에를 다 들어오고.”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신발을 벗던 준석은 은수의 손에 들린 약병을 보고 놀라 달려들어 병을 낚아챘다.
“왜 당신이 이걸 가지고 있어?”
준석은 낚아챈 병을 외투 주머니에 급하게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수의 눈이 커졌다.
“놀래라! 그게 대체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준석은 서둘러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곧장 뒤따라간 은수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자기 정말 이상하네, 문은 왜 잠가? 문 열어 봐 얼른!”
은수가 문을 손으로 두드리며 손잡이를 흔들어댔다. 잠시 후 얼굴이 벌게진 준석이 방문을 열었다. 약병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은수는 의심의 눈으로 준석을 노려보았다.
“뭐야? 대체 그게 뭔데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해?”
“그냥 내가 요즘 머리가 좀 아파서 먹는 두통약이야.”
준석은 희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무슨 두통약이 그런 병에 들어있어?”
“넌 내가 아프다는데 걱정도 안 되니?”
준석은 동정심을 바라는 얼굴로 말했다.
“머리가 왜 아픈 건데?”
“됐다. 넌 어차피 나한테는 관심도 없잖아.”
은수는 팔짱을 끼고 짧게 숨을 뱉었다.
“관심이 왜 없어? 말 나온 김에 당신 대체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준석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뱉었다.
“것 봐! 말 안 하잖아,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혹시 요즘 낯선 사람들이 집 앞에서 자주 보이던데 그것도 당신이랑 상관있어?”
“상관없어!”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혹시 낯선 사람들이 보여도 말 걸어볼 생각하지 말고 피해.”
“상관이 없는데 왜 피해?”
준석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숨을 들이마셨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훅하고 숨을 뱉었다.
“요즘 세상이 무서우니까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야.”
은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준석을 보았다. 준석은 그런 은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은 별일 없는 거지?”
“별일 있지, 아주 많지.”
“무슨 일인데?”
준석이 고개를 슬쩍 돌려 은수를 보았다.
“정말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한 거야?”
“말해 봐.”
은수는 길게 숨을 뱉었다.
“믿음직하지 못한 남편도 별일이고, 아픈 아빠를 언니한테만 다 맡겨야 하는 내 상황도 별일이야.”
준석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하다.”
“뭐가?”
“너한테 그런 남편밖에 못돼서.”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하고 같이 고민하면 되잖아.”
준석은 은수를 한 번 흘깃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들었다.
“어디 가려고!”
“갈 데가 있어.”
“또 그렇게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나갈 거야?”
준석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여보!”
은수가 다가가서 준석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냐니까?”
준석은 은수를 한 번 쳐다본 후 은수의 팔을 뿌리치고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멍하게 현관문을 바라보던 은수는 서재로 가서 책꽂이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있던 검은 봉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병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