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인생영화까지는 아니지만, 인상 깊었고 교훈이 됐던 영화를 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어바웃 타임’이다. 빨간 머리에 마른 체형의 남자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찾는 내용인데, 마지막 부분이 인상에 남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늘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굳이 과거로 돌아가 ‘나의 실수, 나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지 않더라도, 일상 속 ‘오늘의 개선’을 통해 고쳐 나갈 수 있다는 교훈이 위안을 줬다.
하나 더. 일상의 작은 변화가 당장은 티가 안 날 정도겠지만, 운명마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바뀜’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극중 주인공은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고치기 위해 분투하지만, 엉뚱한 결과를 낳곤 한다. 그 점이 예가 되지 않을까. 영화 스토리상 클리셰에 가까워졌지만,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좌충우돌 예기치 못한 사건을 눈덩이처럼 굴려 만든다는 점도 그런 예가 될 것 같다.
지난 금요일이었다. 살포시 드는 게으름에 오전 근무는 재택으로 하기로 했다. 충분히 일어나서 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설 수 있었지만, 침대 속 안락함에 좀 더 몸을 맡기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나가면 충분할 것이라고 여겼다. 마침 아내도 휴가라서 쉬는 날이었다.
오전 11시30분쯤 점심을 먹기로 하고 주방으로 나섰다. 마침 ‘신라면 골드’가 눈에 띄었다. 수출용 라면이라는데, 아내는 ‘골드가 눈에 띄어 사왔다’고 말했다. 무슨 맛일까 궁금하기도 해 끓여 먹기로 했다. 평소였다면 신라면이나 너구리를 끓였겠지만, 그냥 그게 먹고 싶었다. 평소와는 다른 선택이라고 할까. 아내도 평소와 다른 선택으로 신라면 골드를 사왔던 것이고.
물은 팔팔 끓었고, 곧 신라면 골드를 마주 보고 부부가 앉았다. 확 올라오는 냄새와 첫맛이 ‘훠궈’ 혹은 ‘마라맛’이었다. 중화권이나 동남아 쪽 수출형 라면이려니 싶었다. 고춧가루 기반의 한국의 매운맛과 달리 마라 등 향신료 기반의 매운맛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농심 라면에 익숙해진 탓이 크겠지만, 한국 사람 입맛에는 그다지 맞는 맛이 아니었다.
‘후루룩 짭짭’ 한 끼 식사를 그렇게 다 해치우고, 설거지까지 다 끝날 무렵 “아파”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였다. 고통에 짓이겨진 표정으로 명치 쪽이 확 쪼이는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위경련이 일어난 것이라고 여겼고, 따뜻한 물과 함께 소화제를 먹였다. 그럼에도 고통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그때 이미 집을 나가려고 마음먹은 터였는데, 난감해졌다. 오후 일정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으로 짐작이 됐고, 곧 구급차를 불렀다. 좀처럼 명치 쪽 고통이 잦아들지 않는다는 아내의 호소를 보면서 혹시 심장 쪽에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마저 들었다. 구급대원들도 모든 가능성은 열어둬야 한다며 서둘러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다.
구급차 안에서 앞선 일을 되뇌어 봤다. 마라맛 그 라면을 먹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끼니를 최소한으로 했고, 환으로 된 한약도 먹고 있었다. 빈속에 ‘마라맛’ 매운 라면이 들어가니 위장이 놀랐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출근을 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면 어땠을까라는 후회마저 들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리라.
구급차는 지역 2차병원 응급실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진통제와 함께 안정제를 맞고 아내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 즈음 나는 오후에 만나기로 했던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다. 다행이었던 점은 병원에 있는 동안 시급하게 처리하거나 알아봐야 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2시간여가 지난 후 우리는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심장이나 호흡기 쪽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길 뻔했던 하루는 씁쓸한 웃음을 남긴 채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시 드는 생각. 내가 만약 평소와 다름없이 나갔다면 어땠을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날 아침 나는 일찍 챙겨서 자리를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평소와 같은 일상이 됐겠고, 구급차를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여행을 할 수 없다. 어제와 있었던 일상이 오늘에도 반복되는 일상의 여행을 할 뿐이다. 오늘의 저녁이 지나면 내일의 아침을 맞고 전날과 비슷한 하루를 보낸다.
......
다음날. 어느새 영하 10도의 새벽녘이 되었고 나는 눈을 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오늘의 일상에서 ‘어제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아내도 신라면 골드를 먹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라면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그도 시간여행을 할 수 없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엇이 더 나은가’라는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할 것이다. 어제의 사고나 파국은 반복되지 않게 된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서서히 변화는 일어나지만, 그 변화의 끝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갈 정도로 거대할 수 있다. 낮은 확률이지만 작은 선택의 결과가 바로 상상도 못했던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그다음에 돌아올 일상을 통해 ‘그 선택의 결과’를 수정하고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일상의 여행’을 통해서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도 시간여행은 했지만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도 시간여행자이기 전에 일상의 여행자였다.
과거의 선택이 오늘을 바꿔놓듯 오늘의 결정이 미래를 랜덤하게 바꾼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여행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어제와 오늘은 같을 지 몰라도 우리네 인생이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