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도 우아한 암 환자 이야기

영화 #6. 위트(Wit)

by 천생훈장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 엠마 톰슨(Emma Thompson) 주연. 2001년


명민하고 지적이며 실력 있는 영문학 교수인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 영화는 쇼스타코비치의 긴장감 가득한 음악과 함께 비비안이 “암에 걸렸다(you have a cancer)”는 통보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담당 의사이자 교수인 컬리키안(Dr. Kelekian)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병명과 병기, 치료 계획만을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비비안도 그에 밀리지 않는 표정으로 의사의 통보를 완전히 이해하였다고 되돌려 준다. 그러니까 비비안은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혹은 잃지 않으려는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주인공 비비안이 항암 치료를 받으며 투병을 이어가다가 결국 죽기까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비비안의 현재 투병 과정과 과거 회상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중간중간 비비안이 카메라를 보면서 혼자 내레이션을 하는 장면들이 매우 독특하다. 원래 연극이었던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객석의 관객을 향해서 독백을 하는 연극의 포맷을 그대로 차용한 게 아닐까 싶다.


주인공인 비비안 교수와 그의 스승 에블린 애쉬포드(E. M. Ashford) 교수의 주 전공이기도 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의 ‘거룩한 소네트(Holy Sonnet)’, 그중에서도 특히 열 번째 편이 주요한 모티프로 영화 곳곳에서 사용된다. 영화의 내용과 시가 적절하면서도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영화의 품위를 더해주는데, 이 시를 배경으로 예정된 죽음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아하지만 가슴 아프다.


지적이고 자존심 강한 교수이자 말기 난소암 환자인 비비안 역을 맡아서 영화 대부분의 분량을 소화한 엠마 톰슨(Emma Thompson)의 연기는 과연 “Two thumbs Up!”이라고 할 만하고, 그의 스승 애쉬포드 교수 역을 맡은 에일린 엣킨스(Eileen Atkins)는 많지 않은 출연 장면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 준다.


영화 제목인 “Wit”는 우리가 아는 그 단어가 맞다. 그러니까 ‘유머와 위트’라고 할 때의 그 위트. 우리 말로는 재치 혹은 기지라고 번역되지만, 그렇게 번역된 단어로는 다 포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곧잘 영어의 음차 그대로 사용되는 단어.

비비언은 존 던을 죽음의 심연을 깊이 탐구한 시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음과 초월을 다룬 난해하고도 역설적인 시를 공부한 비비언은, 자신이 전공한 시의 내용처럼 가능하면 자신의 병과 죽음에 대해 적절한 거리와 객관적인 태도, 그러니까 위트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위트 혹은 냉정함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 걸까.

시간이 지나고 증상이 심해질수록 비비언은 점점 더 약해지고 외로워진다.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존경스럽지만, 사실은 그 약함과 외로움이 오히려 더 시적인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비비안은 이전까지 학자로서 나름대로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한 시의 내용을,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머리만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온전하게 이해하고 용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담당 주치의인 하비 컬리키안 교수와 그의 전임의사인 제이슨 포스너(Jason Fosner)가 치료 과정에서 비비안을 대하는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고 무감하지만, 질병을 인간 존재의 전체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의학적인 대상이자 분절된 실체(medical subject, medical entity)로 배우는 의사들에게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컬리키안이나 제이슨과 유사한 태도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효율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소위 ‘무심한 관심(indifferent concern)’이라고 말하는 이런 종류의 태도가 어느 정도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는 언제나 의사와 환자의 ‘만남(Encounter)’,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고, 이런 만남이 치유적이기 위해서는 의학적인 검사와 진단, 치료 방법을 넘어서는 전인적인 교감과 이해가 요청된다. 그래서 냉정한 거리두기와 따뜻한 공감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모든 의사, 더 넓게는 모든 보건의료인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능력이자 덕목이지만, 생각처럼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컬리키안과 제이슨이 의학적인 냉정함의 전형을 보여 준다면, 비비안의 담당 간호사인 수지 모나한(Susie Monahan)이 보여주는 태도는 공감과 연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을 지나치게 관습적으로 배치해 놓은 듯해서 약간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이 연극이 의과대학생을 비롯한 보건의료 관련 학생들의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널리 인정되어 전문 극단의 공연, 보건의료 관련 대학생들의 연극 프로젝트 등으로 많이 활용되었고, 영화 또한 의과대학, 간호대학 등의 교육 과정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의과대학생들과 수업에서 꼭 같이 보는 영화 중의 하나이다.


영화의 거의 끝부분, 그러니까 비비언이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이제는 아주 늙어서 상노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스승 애시포드 교수가 병원을 방문한다. 증손자의 5살 생일이라 시내에 나왔다가 학교 사무실에서 비비안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 노스승과의 만남 장면은 영화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데, 아름답고 영적이며 비감하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한없이 슬퍼진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음악인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Spiegel im spiegel(거울 속의 거울)’이 이 장면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단순하고 깊은 선율 또한 마음을 울린다.


영화의 모티프이고, 영화 내내 주인공이 낭송하는 존 던의 거룩한 소네트 10편은 아래와 같다. 영화에서 이 시를 논하면서 주인공 비비안에게 그의 스승 애쉬포드 교수가 “대문자로 죽음...,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그리고 쌍반점...(And Death capital D... shall be no more; semi-colon...)”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성공회 사제이기도 했던 존 던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시로 표현했는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구절도 그의 시에서 나온 거란다.


"Death Be Not Proud"


DEATH be not proud, though some have called thee

Mighty and dreadfull, for, thou art not so.

For, those, whom thou think'st, thou dost overthrow,

Die not, poore death, nor yet canst thou kill me.

From rest and sleepe, which but thy pictures bee,

Much pleasure, then from thee, much more must flow,

And soonest our best men with thee doe goe,

Rest of their bones, and soules deliverie.

Thou art slave to Fate, Chance, kings, and desperate men,

And dost with poyson, warre, and sickness dwell,

And poppie, or charmes can make us sleepe as well,

And better then thy stroake; why swell'st thou then;

One short sleepe past, we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세고 무섭다 일컫지만, 넌 그렇지 않나니.

네 생각에 네가 해치운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불쌍한 죽음아, 넌 나도 죽일 수 없다.

너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 휴식과 잠에서

큰 기쁨 나오나니, 너로부터는 더 큰 기쁨 나온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 유골의 안식과 영혼의 해방 찾아

되도록 빨리 너와 함께 간다.

너는 운명, 우연, 제왕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의 노예일 뿐.

그리고 독약과 전쟁과 질병과 함께 산다.

그뿐인가, 아편이나 마법도 너의 일격만큼

또는 더 잘 우릴 잠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뽐내느냐.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난다.

그러면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철자가 이상해 보이는 단어들도 원문 그대로란다. 현대 영어와는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고, 소네트에 반드시 적용된다는 압운(rhyme)이 있는 원문의 느낌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비비언과 애시포드 교수가 읊는 이 시를 듣고 있으면 영시의 운율이 갖는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진다.


영화를 보고 나면 베아트릭스 포터의 사랑스러운 동화책인 '플롭시의아기토끼들 이야기(The Tale of the Flopsy Bunnies)', 그리고 마가릿 와이즈 브라운의 그림 동화책 ‘엄마, 난 도망갈 거야(The Runaway bunny)’도 읽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그게 뭔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찾아서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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