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파리의물건@La Durée Champ Elysées
원했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꽤 열망하고 있었다. 꼭 파리여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상이 어디든지 간에 나는 내 신혼의 시기를 옳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고, 또 대체적으로 ‘그냥 좋았던 것 같다’라는 표현으로 이 시절을 뭉개서는 안 되었다. 이 모든 느낌은 장소나 대상 특정적인 단서들을 반드시 갖춰 한정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나머지의 공백을 판타지로 추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형형색색의 마카롱이 그저 파리의 아름다움이었노라 말하기 싫은 탓에, 나는 ‘추억도 조건이 있어야 한다’를 먼저 밝히는 바이다.
추억은 ‘경험했다’가 주는 실제적인 사건보다 훨씬 복잡한 동기에 의해 다져지는 것이다.
Champ-Elesee의 Salon de the, Laduree에 대한 그리움은 단 한 번도 ‘한 입 마카롱의 황홀했던 순간’이었던 적이 없다. ‘비싼 마카롱을 즐기는’ 취향도, 처지도 아닌 파리 생활자였던 내게 마카롱 한 입의 황홀경을 말하는 건 꽤 호들갑 아니겠는가.
나는 그저 하릴없는 산책, 관광객들의 들뜬 몸짓에 대한 심드렁한 관찰, 고급스러운 디저트에 대한 학습욕구 같은 이유로 그곳 살롱에 발을 들였는데, 아, 이제야 그곳이 참 그립다. 또래 대중들이 좋아 마다하지 않는 Laduree 마카롱을 같은 마음으로, 같은 동기로 추억하진 않는 탓에 서울에 돌아와서도 나는 Laduree를 일부러 찾는 일은 없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있다. 첫째, 그까짓 한 입 거리의 고급스러운 달콤함으로 Laduree를 아는 체하는 건 왠지 얕고, 둘째, 한 입 베어 물은 뒤, C’est magnifique!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서울은 파리가 될 수 없으므로, 셋째, 불어와 중국어로 가득한 BGM같은 앙상블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각각의 테이블에 놓인 티팟에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수증기의 향과 어우러지는 파스텔톤의 마카롱. 이런 풍경은 여느 보통날, 귀족들의 거실 풍경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고상하며 아늑했다. 내게는 특별히 바닐라향의 차에 라즈베리 마카롱은 근사하기 짝이 없고, 살롱을 감도는 민트빛 아늑함에 폭 안겨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어뜨려가며 아주 옳게, 풍요롭게 시간을 쓰곤 했던 거다. 잔상이나 잔향이라는 공감각적인 기억. 나는 샹젤리제 한복판에서 영어로, 중국어로 말하는 관광객 틈에서 자신 있게 주문하련다. “Vous voulez recommender de thé si j’ai l’air comme une parisienne?”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