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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y 14. 2024

내쪽의 무엇, 죽은 육체를 웬일인지 똑바로 쳐다보았다.

01.


길을 잃었다.

대학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그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있음에

자부심과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는 길을 잃고 헤맨다.

섞인 생각으로 여기저기가 혼란스럽다.

아마도 늦었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조바심은 시계를 볼틈도 주지 않고

이성을 놓친 안쓰런 불안이

초라하게 허둥댄다.


가까스로 도착이다.

모두가 오르는 저기가 정문이 맞는 것 같다.

맹목적으로 따라 오르는 그녀의 발이

구멍에 빠진 듯 자꾸만 푹푹 걸린다.

그러고 보니 계단은 신문지로 덮여있다.


신문지로 덮인 무너진 계단을,

어떤 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보다 훨씬 나은 기술로 올라간다. 자책 섞인 우울한 심정으로 조금 더 기어오르던 그녀는, 문득 계단 위 저곳이 그녀의 목적지가 아님을 알고서...

멈췄다.


가려던 곳이 아니다.

그리던 장소가 아니다.


길을 잃었다.




02.


계단에서 내려와

지독히 가난한 동네

가난은 왜 지독함과 어울리는지

철썩 눌어붙은 회색이 깔린

오래된 빌라촌을 지나

언덕처럼 솟은 가파른 담벼락


울퉁불퉁한 돌을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시멘트 담벼락 끝에

꽈배기 모양의 철끈이 보인다.


이거다. 이걸 잡고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리면

저 너머로 갈 수 있다!


꽈배기 모양 철끈을

팔을 뻗어 꽉 잡는다.

끝이다. 다음으로 갈 것이다.

이제 위쪽으로 힘을 실어 몸을 올리면 되는데

탄력을 받아줘야 할 몸이 오르지 못하고

무겁게 아래로 쳐져 버둥거린다.


능력이 사라진 스파이더맨처럼 대롱대롱,

철끈을 잡은 팔의 힘은 풀려나가고

아래를 보니 만만했던 담벼락은

갑자기 아찔한 고층 아파트로 변해있다.

무섭다. 팔의 힘이 없다. 너무 무섭다.


어쩌자고 이곳에 오른 거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니

고층 아파트가 아니라 다시 낮은 담벼락이다.

손을 놓아 떨어져도 상처만 날 뿐

죽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고 나서

손을 놓은 건지 저절로 힘이 빠졌는지

아님 그대로 잡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고...




03.


장면이 바뀌어 유적지를 걷는다

등산복을 입은 두 분의 아주머니가 앞에서 걷고 계셨다.


그녀는 지쳐있었지만 그냥 걸었다.

왜 걷는지 모르지만 그 길을 끝까지_


옹기종기 보이던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저 멀리 아주머니 두 분만 보이는데,


어느덧 공간은

사막 같은 곳으로 변해있다.


문득

아무것도 없는

옅은 갈색 길 옆으로


일정한 패턴의 연둣빛 언덕이

밭고랑처럼 규칙적으로 솟아올라있는 게 보였고,


그녀는 그런 풍경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멀리서 본 녹차밭과 비슷하지만

잎사귀가 아닌 고운 모래로

엠보싱 화장지 같은 느낌.


저쪽 멀리 선

그녀보다 먼저 가신 아주머니 두 분이

멈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낮은 산 같은 엠보싱 아래에는

둘러보는 그녀만 있었다.


아,

아...!

개를 돌리다

스치듯 무언가를 보았다.


커다란 육체.


어딘가 잘린 듯 축 쳐져 살색과 피색이 섞인 육체가

엠보싱 언덕 가운데서 짚으로 교묘히 일부만 덮여 있다.


죽은 육체를 웬일인지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서우나 두려움은 아니었다.


육체는 애처로운 나의 편,

내쪽의 무엇 같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진 않고

그저 얼음처럼 따뜻한 눈으로

어렴풋하게 섬세히

고통받았을 육체를 살폈다.


물인지 거울인지

육체 앞 투명한 푸른색에

축 쳐진 핏빛과 살색이 비쳤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이 모든 걸 느꼈지만

아픔을 느낀 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멀리 있는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생생히 들렸다.

육체를 데려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그녀들은 육체를 처리하러 여기 온 것이다.


그녀들의 말은 정성이 담겼지만 담담했고

육체는 초라했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왔다.

아니 좀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시체를 데려갈 사람들.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누운 채로

선명해지는 꿈을 더듬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이제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


두 명의 여인은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을까?

육체는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일까?


잠시 그런가 싶었으나 아닌듯하다.

그보다는 강하게

'그녀 자신'이라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죽은 걸까?

새로 태어나는 걸까?





일어서서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꿈을 잊은 그녀에게


남편이 뜬금없이 귀뚜라미 이야기를 꺼낸다.


"여보, 지난번 내가 우리 집에서 귀뚜라미 봤다고 했잖아.


그거 오늘 아침에 내가 죽였어.


이상하게 그놈이 생각나고 왠지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싶더라니, 글쎄 오늘 아침 화장실에 떡하니 있더라고."



"정말? 그게 왜 거기에 있지?

그냥 놔주지...

왜 죽였어?!!"



순간 그녀는 울상이 되어

울 것 같은 원망을 쏟는다.



"엥? 죽여야지! 당신 곤충 엄청 싫어하잖아. 그거 더듬이가 길게 나와서 갈색인데... 당신이 보면 진짜 무서워했을걸? 근데, 화장실에 나타난 게 신기하긴 해. 죽을 운명인 거지."



"축 쳐진... 갈색...

그래, 좋은 곳으로 갔겠지. 그럴 거야.

... 잘했네."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귀뚜라미 꿈이었는 지도.


엠보싱 화장지에 싸여

몸을 떠나 훨훨 자유로이,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마저 나지만


그래도 간절히, 부디 간절히...

좋은 곳으로 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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