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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Apr 11. 2024

가장 찬란한 날에, 그냥 하는 나로

#19. 다시, 지민

우린 헤어졌다.


아늑한 식당에서 따뜻한 빛을 쪼이던 날.


최고의 졸업 연설을 하고서

환한 엄지 척을 날리던 날.


그곳 창밖으로 보았던

낡고 조용한 주택의 모양과

늦은 오후 낮은 산의 외로운 느낌은

아파서 당분간은 떠오를 때마다 사무치겠지만


우린 헤어졌다.

헤어지기로 했다.


이별을 말한 여자친구를 혼자 두고

돌아서서 다시 회사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러면서도 집에 와서는 그의 말을 곱씹어

'정리'할 시간을 줘라고 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줘라고 했으니

그는 나와 헤어지기 싫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고.


그러면서 지금은 너무 아프니 서서히 식어 정말로 아프지 않을 때 헤어지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다가...


이별이 괜찮기를 바라는 게 미련한 짓 같아

다시 또 마음이 쓰리다가...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아프지 않을 때 헤어지는 게 아니라

아프지 않을 때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도

11시가 되고

다음 날이 되어도


준석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큰 호흡을 쉰다.


6일째 되던 날,

그의 연락이 왔고,


7일째 되던 날,

서로는 마주 보고 앉아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둘은

각자의 길로 흩어져 걸어갔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고,

집에 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긴 했지만...


일주일 전과 달리

지민의 마음은 차분했다.


정말로 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루는 흘러가고 있었다.


서서히 이렇게 익숙해지겠지...

오빠 없는 일상이 아무렇지 않은 날.



그도 큰 호흡을 쉰다.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큰 호흡을 쉰다.


마지막에도 그녀는 그를 챙겼다.

아픔도 받아들이자.

감정은 내 것이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니까.

진짜 나는 더 큰 존재라서
어떤 감정이든 품을 수 있으니까.

혹시나 힘들면 자기처럼 해보라며,

여전히 지민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감정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나는 그녀를 보낸 오늘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Kill me!

"미운오리새끼는

차라리 백조들 틈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응? 아이들 보는 책에 'kill'이란 단어가 들어가다니

이건 좀 심한데?'


조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지민은

멈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헤어지고 나서 연속 세 번째, 주말마다 찾아오는 언니를 동생은 열렬히 반겨주고 있다. 먼저 결혼한 동생은 그런 남자랑 결혼하면 큰 일 난다며, 준석과 헤어진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미운 오리새끼]에 이런 내용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순간 지민의 머릿속에 준석이 했던 말이 스친다.

말 그대로 이전 자기의 죽음이지.

버둥대며 매달리다가 끝까지 가서,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냥 절벽으로 떨어지는 일.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변한 게.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신 없어하던 내가 달라진 게.

구박하는 다른 오리들을 피해

연못가를 벗어난 미운오리새끼.

죽더라도 백조들한테서 죽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의 본래 모습은

못생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아름다운 백조.



집으로 돌아온 지민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뭔가를 써보고 싶었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호흡, 명상... 완전히 변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대로야. 여전히 어찌할 줄 모르고 어리숙해."


번듯하게 이룬 것 하나 없어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지민에게,


준석은 말했었다.


하지만 확실히 변한 건 있지. 행동에 이유를 만들고 간절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원하는 일을 그냥 하고 있잖아. 내 목표가 아닌 남의 목표를 잡고서 늘 비교하며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어 있던 때와는 다르지. 조급하고 불안하던 때를 생각해 봐. 여전히 가끔은 허둥대고 도망치려 하지만 멀리 안가서 확실한 여기로 다시 돌아오잖아. 그럼 된 거 아닐까?


그래, 선배.

내가 변한 부분

내가 경험한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돌고 돌아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더 나은 가면을 써봐도

내 안에서 발견한 더 큰 무엇

그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누군가에겐 또 뻔한 이야기가 되겠지.

결국 자기 안에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내 안에 지켜보는 그 존재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

아니 자세히 보면 그 존재가 나를 붙잡고 있지.

나의 가장 큰 두려움과 어둠을 통해.


맞아. 부정적이며 중독적이며,

강박감에 사로잡힌 방식들에 대해 죽는 거야.


더 나은 오리가 되려는 발버둥에서 벗어나

본래의 백조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시도.


애벌레는 사라졌어. 나비가 되었거든.

굼벵이는 이제 없어. 매미가 되었으니까.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아주 많은 곳에 있어.


다른 방법, 다른 태도를 연습해서

다른 가면을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도록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거야.


말 그대로 새로운 나로 탄생하는 거지.


이건 모두가 말하는 성공 조건을 갖추기 위해

100번 쓰고, 생생하게 상상하고, 확실하게 믿으며

다짐하고 의지를 짜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진짜 의도를 발견한다면

굳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행동하게 되니까.


행동을 위해 뭔가가 더 필요한 게 아니라

행동은 그냥 자연스러운 거야.


거짓으로 꾸며 관대하고 경건하려는 게 아니라

저절로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포용하게 되는 것.


알에서 깨고 나오면


돈 잘 버는 굼벵이

몸매 좋은 나비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가장 멋지게 수행하는

독특한 자기의 존재가 되지.


본래의 나로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난 그게 영혼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그래 맞아...

어렵지.


어렵고 알 수 없지만

그저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볼게.

지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그 한 발이

다음 한 발을 이끌어준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까.



***

하하하

뭐 이리 거창해?


준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읽지도 못할 편지를 쓴 것처럼 돼버렸네.

그래, 아직 헤어진 지 한 달도 안 됐으니까...


괜찮지?

응,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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