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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Apr 10. 2024

준비했지만 준비 못한 이별

#18. (정거장, 잠시) 지민과 준석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는 준석을 향해

지민은 환한 웃음과 함께

커다란 엄지 척 두 개를 들어 보였다.


"괜찮았어?"


"응, 너어~~무!

너무 좋았어."


"다행이네, 밥 먹으러 가자!"


지민이 찾아 둔 근처의 식당은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7년 차 커플에게 딱 맞는

아늑하면서도 느긋한 카레집이었다.


두 사람은 가게 안쪽

빛이 쪼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손님도 거의 없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눠도 개의치 않을 것 같다.


매운맛 순한 맛 서로 다른 카레를 시켜 반반씩,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지민이 말을 꺼냈다.


"오빠 오늘 연설에서 그 이야길 했잖아.

'동틀 녘이 가장 어둡다는 말'..."


또 나왔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즐거워하는 저 표정


"여전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한동안 나도 그런 시간이 있었고...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거든.


근데 그게 사실, 참 힘들잖아.


과연 오늘 연설을 들은 사람들 중

두려움을 정면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될까?"


순간 준석은 자신의 연설이 졸업식에서 흔히 등장하는 현실성 없이 듣기 좋은 내용으로 취급당한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그것은 준석이 가장 경계한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모두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봐.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지.


적어도 나는 그랬어. 원래 힘들다고 인정하니 오히려 편하더라. 어렵지만 기어코 이 벽을 넘어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준석의 목소리에

약간의 거리감이 담겨있다.


지민은 남자친구의 기분이 상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태연히 말을 받았다.


"응, 오리는 날개가 있지만 굳이 날지 않지. 날개가 있다고 꼭 날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애쓰느니 옥수수 가득한 담장 안에서 만족하고 편히 사는 삶이 나을지 몰라.


하지만 만약 자신 안에 날개가 꿈틀 된다면, 너도 날아보라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면 날기를 선택해야겠지. 매일 훈련하며, 때론 너무 힘들어 못할 것 같다고 발버둥 치기도 하고... 위기라고 생각되던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나는 자신을 발견할 거야.


지민은 앞에 있는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선배는 날아보기를 원했고 결국 멋지게 날아올랐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디 가나 좋은 평가를 받는 오빠였지만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가 되어 졸업식 연설대에 설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여기까지 오는데 참 고생 많았지."


그다음 무언가 '함께'가 담긴 말이 나오길 바랐지만, 테이블 위에 진동이 울렸고 준석은 핸드폰을 들고서 급히 자리를 떴다. 다시 돌아온 준석은 특유의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의 시계를 내려본다.


"그러게, 시간 참 빠르지? 정신없이 흘러간 것 같다! 있잖아... 연설한다고 오전 내내 비웠더니 그 사이 일이 좀 생겼나 봐. 여기서 30분 정도만 더 있다가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냐? 오늘은 하루 쭉 쉬면서 저녁에 축하파티까지 하기로 했는데... 미안."


서운해하고 싸우던 사건이

비일비재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 지민은 실망한 내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일이 생겼다는데 가봐야지.

...

오빠는 날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가보라는 말 뒤에 붙은 문장이

심상치 않다.


지민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울먹거릴 듯한 표정을 가다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5년 전쯤이었나? 기억나? 상담센터에서 나왔을 때 나는 깊은 절망감에 쌓여있었어.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심리학을 선택했을 땐 이게 정말 내 길이구나 생각했었는데... 또 한 번 세상에 내쳐진 기분이었지.


있잖아... 오빠완 좀 다르지만... 그때 내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며 배운 건 '지금도 충분하구나.' 하는 거였어. 사람이든 직업이든 의지하고 기댈 대상이 없더라도, 어떤 조건을 더 갖추지 않더라도 '그냥 여기서 나로서' 행복할 수 있구나....라고.


뭐, 눈에 띄는 대단한 성과를 얻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다시 이불로 들어가고 싶은 아침을 맞지 않는 것만으로,


의지와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자책 없이 그냥 움직이게 된 것만으로도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화가 나는 패턴에서 벗어나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겐 정말 큰 변화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이제 오빠에게도 그렇게 많이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연습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아.


선배를 많이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이 바쁘고 여유를 갖기 힘든 오빠와 나는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결혼도 빨리 하고 싶고, 쓸모없어 보이는 대화하기도 참 좋아하고...


나에겐 그냥 같이 보내는 시간들이 참 중요한데...  알면서도 너무 오래 끌고 왔네... 이제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변명하고도 싶었지만 지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별조차 귀찮아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 마음은 무의식 중에라도 오래전부터 헤어져야 함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 없는 준석을 향해 지민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며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잡지도, 매달리지도 않는 남자 친구가 야속했지만

침묵을 바라보며 자신을 달랬다.


'그래, 지민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둘은 한참 동안

창밖에 서 있는 각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았을 때,


멈춰서 기다리고 있는

준석의 눈동자를 만났다.


다정한 눈동자가

지민은 슬펐다.


"미안해."


그 말만 했으면 미울 뻔했다.


"고마워... 고마웠어."


그래도 서운하다.

서운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지 말자.

나에게도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줘."


다행이다.

아... 다행이다.

나도 몰랐는데 그냥 다행이다.


그 와중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듣고 싶다니


그렇게 연습하고도 나는

그를 보낼 수 없는 건가?


그래,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웠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나와버렸지만,

나도 오늘 말하려 한 건 아니잖아.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해보았건만

막상 현실에 닥치는 감정과 생각들은

혼란스럽다.


당황스럽게도,

잡아주길 바라는 여자와


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


그렇게 두 사람은

빛이 아늑한 카레집을 나왔다.



* 하루 늦은 새벽 발행을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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