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게 아니야
chapter 1. 관계
episode1.
박이철과 김은영
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게 아니야
01. 엄마(김은영)
그날 엄마는 알았다고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던 그날
울음을 그치려 샤워를 하면서
욕설도 폭행도 없었지만
말로써 상처를 주고받고
상대를 자기뜻대로 바꾸려는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엄마의 일도 엄마의 성격도
받아주지 않고 고치려는 아빠는
그래 당신은 애들 엄마로서
보살펴 줄 사람, 같이 살 사람으로서
아내가 필요했던 거지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거라는데,
당신은 날 사랑한 게 아냐
많이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다들 그렇게 참으며 맞추며 살아가는 게 또 삶이지 않나?
갑자기 온 세상 그녀들이 슬픔이 몰려오는 듯했고
멈추려 들어간 화장실에서
엄마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대.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에 대고
고생한다.. 애쓴다.. 수고한다.. 하면서
당신을 포함한 모든 여자들을 위로했대.
일그러진 얼굴이 무섭기까지 해서
서둘러 지우려 샤워를 했대
샤워를 하며 알았대
나도 마찬가지구나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사랑하기가 참 힘들구나
그러고 나니 밉지는 않았대.
밉지는 않았지만 슬펐대.
용서와 연민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사랑하기 힘들단 사실이.
돌아서면 또 살아가겠지
이젠 유치하게 이혼을 들먹이고 싶지도 않고
예전만큼 상처받고 괴롭지도 않으니
그래도 이젠 멀리서 감정을 바라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엄마는 사랑하기 힘든 자신이 측은했대.
그러다가... 점점
아빠도 측은하고
또 그러다가...
서서히 마음이 확장되면서 조금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대
측은한 자신을 포함하여
또 한 명의 측은한 인간 아빠마저도
그래, 당장 얼굴 보며 웃긴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괜찮아지겠지.
02. 아빠(박이철)
쓰고 나면 원상 복구 좀 하라는 건데,
바로바로 정리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언제나 마무리는 내 차지지.
어이구. 밉다.
그러고 보니 애들한테 신경도 안 쓰고,
자기 일하는 거 반만이라도 가정에 애정을 좀 쏟아보지 반찬이 이게 뭐야.
대충 하나 고르면 되지 이 여자는 마트에서 음료 하나 고르는데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지?
어이구. 밉다.
티가 났나 보군.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네.
말도 별로 안 하고,
냉랭한 이 분위기가 나도 싫지만...
미운 걸 어째.
03. 아빠와 엄마(박이철과 김은영)
아:
당신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엄:
응, 커피 좀 타올게. 음악도 좀 틀까?
아:
당신은 아무렇지 않나 보네.
태연하게 커피나 마시고.
난 당신 얼굴도 보기 싫은데,
엄:(떨리는 목소리로)
있잖아. 여보. 나 참는 거야.
당신은 얼굴 보기 싫은 정도겠지만,
난 당신이란 인간이랑 살기가 싫거든.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
참느라고 그래.
마음을 차분히 하느라고. 당신을 마주하려니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들어야겠어서,
간신히 이러는 거라고.
아:(급격히 어두워진 표정)
또 그 이야기야?
살기 싫다는 얘기?
엄:
극단적인 표현이 나와서 미안한데,
솔직한 내 심정이 그래.
그 마음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아무렇지 않게 비난하고 상처 주는 행동,
못마땅해하는 태도가 견디기 힘들다고.
나는 온옴으로 저항하는 거야.
이 만큼 괴롭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아:(그럼에도 굳건히)
블라블라... 오목조목...
당신이 고쳐야 할 점....
잘못하고 있는 것들.
맘에 안 드는 점.
엄: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다고 하는데도 계속하는 걸 보면 당신은 진짜... 그런 것도 이해 못 해주는 거야? 당신같이 까다로운 사람은 어떤 룸메이트도 버티지 못할걸?
아:
'그런 것도'가 아니라 나는 그게 진짜 힘들다고.
뒷정리를 다 내가 하고 있잖아.
나만 이렇게 까다롭다느니 인신공격까지 할 거 없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당신과 나 사이의 문제야.
엄: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당신 성격 맞춰주는 거 너무 힘든데,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이들만 아니었음...
그 책임감만 아니었음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아:
당신은 여전히 참 이기적이야.
당신은 친정엄마가 밉다고 호적을 팔 수 있어?
아무리 싫어도 안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나는 당신과 아이들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는데,
나에게 당신과 아이들이 없으면 내 존재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라서... 헤어짐은 아예 기본 전제가 없는 건데...
당신은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다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냐. 나에게 당신은 이미 내 존재의미와 같아.
엄: (흔들리는 속마음)
속좁다 사랑을 할 줄 모른다 했지만
당신은 나보다 어른이구나...
어떡하겠어. 살아야지.
운명을 사랑해야지.
언제까지 난 결혼에 어울리지 않느냐니
이럴 땐 남편도 아이도 없이 자유롭고 싶다느니
그런 생각을 해서 뭐 할 거냐고.
사실은 남편과 아이들 없이 살 수 없지 않나?
덕분에 너무 행복하지 않나?어쩌면 나도 최후의 옵션(헤어짐)은 그냥 없는 셈 쳐야 하지 않을까...?
엄:
그래, 나도 알아. 나도 너무 힘드니까,
알면서도 자꾸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는 거라고.
난 그냥 가장 편해야 할 당신이 불편한 게 싫어.
눈치 보기 싫어.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당신이 말하는 거 신경 쓸게.
고치려고 노력할게.
하지만 바로 고쳐지지 않는다고 뭐라고 좀 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바뀌어~
아:
알아, 한 번에 안 바뀌지.
신경 쓴다는 말.
그걸로 족해.
당신이 고집을 좀 내려놓고
신경 써보겠다는 말 하나만 해주길 바랐어.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남편이 속이 좁아서 어쩌냐?
서로 이해하고 살아야지.
그럼 우리,
화해하는 건가?
어쩌겠는가?
그렇게 사는 거지.
지나고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아 지고.
돌아보면 그렇게 지나와서 다행인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너무 힘들면 어쩔 수 없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된다면야 정말 고려해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 해석이 과장된 거라면?
계속된 상처로 인해
작은 말, 작은 행동 하나에도 강한 저항감이 생기고
그래서 살짝만 건드려도 분노와 억울함이 솟아오른 거라면?
그래서 알아차려야 한다.
극단으로 치닫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전
알아차리고 감정이 흘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아, 이것은 화다!'
'나는 이런 상황을 끔찍이 싫어하는구나!.'
사실 자잘한 거 지적하는 아빠가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인 건 맞지만- 100%를 기준으로 정말 나쁜 건 20% 정도
또 뭐라 한다
또 지적한다
또 상처 준다
아파, 괴로워, 못살아....
이야기를 붙여 붙여 80% 의 눈덩이를 키운 건 엄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엄마도 아팠으니까.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을 볼 수만 있으면 된다.
원래 거기 20%만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면 된다.
나쁜 사람, 까다로운 사람, 매번 상처 주는 사람
판단과 해석을 떼어놓고 보니,
뭐 그렇게 심하게 비난을 한 것도 아니고
애들 앞에서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랬네... 그러긴 했네...
뒷정리하라고?
오케이!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앞으로 신경 쓸게요.
어쨌든 그래도 아빠가 이해심을 넓힐 필요는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내 맘 같을 순 없으니까.
엄마 말로는,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건 아니래.
엄마도 마찬가지
하지만 두 분의 마음 깊숙이 진짜 당신들의 내면에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
며칠 후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엄마도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했대.
어쩌겠어. 그러면서 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