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는 일을 하면 에너지가 소모되겠지만 난 반대야. 육아하고 살림하고 소모된 에너지를 일을 하면서 충전한다고."
은영의 말이 성실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린다.
참았던 불만이 기어코 기어 나온다.
"그래, 맞아. 난 회사에서 비위 맞추고 하기 싫은 거 하고 심장 다 내놓고 일하다가 집에 와야 충전이 좀 되는 [보통] 사람이거든. 당신처럼 꿈 찾아 좋아하는 일 하는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집에서라도 좀 편히 쉬고 싶은데, 와이프란 사람은 남편이 와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거 같네."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아내.
"팔자가 좋다고? 내가 얼마나 아끼며 눈치 보며 살고 있는데...!"
순간 은영은 크게 숨을 쉬었다.
'진정하자. 내가 마음공부 몇 년차인데. 이런 감정에 끌려다니면 안 되지. 저 사람도 피곤해서 저러는 거잖아.'
"여보 난 내 시간이 간절해. 자기 나 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결혼하고 나서 일도 못하고 하루종일 아이 돌보고 살림하고 이 시간이 유일한 나만의 시간이라고."
"솔직히 그게 일이야? 취미지. 하는 것까진 못 말리겠는데, 차라리 일이라고 하지 마. 그래야 나도 기대라도 안 하지. 나 잘게. 적당히 하고 자."
안 봐도 뻔한 아내의 얼굴을 외면하고, 비어있는 안방으로 들어온 김성실은 가족사진을 멍하니 바라본다.
"하고 싶은 일 하니 좋겠네. 누군 회사 다니고 싶어서 다니나?"
몸이 더 무거워진 것 같다. 이젠 속까지 답답하고 두통도 몰려온다.
샤워기를 틀어 온몸에 물을 뿌린다. 그제야 기운이 좀 회복된다.
...
배터리처럼 소모되었다가, 간신히 충전해서 돌아가는 이 생활.
박성실은 조금 있으면 충전조차 할 수 없고 '화'마저 없어져 무감각의 상태가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거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가끔 떠올리지만 역시 답이 없다. 누가 몰라서 그러나?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뭔데? 부모님 기대대로, 회사의 요구대로 그게 내가 원하는 것 같기도 해서... 너무 오래 달려온 탓에 이제는 정말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찾는 방법도... 하는 방법도 잃어버렸다.
'더 생각해 봤자 뭐 해. 잠이라도 자야지. 그래야 내일도 일하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당신, 많이 지친 것 같아. 미소가 없어진 지 오래된 거 알아요?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이 나한테도 매번 퉁퉁거리고."
아내는 도인이 틀림없다. 순간 성실은 무장해제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제야 외면했던 미안함이 몰려왔고, 이렇게 착한 아내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게 여보,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그래도 나 성실하게 살고 있는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잖아."
"분명히 하루종일 일했는데 제자리인 기분이야.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은 하는데 집에 오면 책 한자도 읽지 않는 내가 한심하다구. 그런데 말야, 솔직히 더는 못하겠어. 다 소진되어 버린 것 같아.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업무 실력도 쌓아야 하고, 누구는 부동산이다 재테크다 잘만 하던데 나는 그럴 여력이 없어. 나도 잘해보고 싶은데. 우리 지우 동생 생기기 전에 방 3개짜리 집으로 이사도 가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로하고 싶다.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야. 더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거 같아. 방법을 달리하고 관점을 달리해야지. 근데 그것도 좀 쉬어야 생각날 거야. 지금처럼 지친 상태로 노력만 더 하려고 하다간 당신 진짜 탈진해서 아플지도 몰라. 좀 쉬어줘. 응?
물론 이런 날 저런 날 있지. 힘든 날도 있고 할 만한 날도 있고. 그런데 자기는 순수한 열정으로 성실히 사는 게 아니라 억지로 끌려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게 보여. 당신이 정말로 원해서 하고 있다면 힘들어도 행복할 거야. 스트레스도 받겠지만 이렇게 무기력해지진 않을 거라고. 당신 행복해?"
좀 전까지 머리아팠던 답 없는 질문을 눈치 없는 아내가 또 하고 있다. 바짝 말라버린 성실의 마음에 '행복하냐'는 질문은 철없는 소리같다.
"그럼 어떻게, 당장 회사를 그만둘까? 가만히 있으면 돈이 나와? 당신은 돈도 한 푼 벌지 못하면서 또 팔자 좋은 소리 한다."
아, 이게 아닌데...
뒤늦게 수습하려 고개를 드는 순간,
씰룩씰룩하는 아내의 눈과 마주쳤다.
아내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속이 쓰리다. 거실에 뒤따라 나가니 아내는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꺼져있는 TV만 응시하고 있다.
"내가 결혼할 때 한 가지 바랐던 게 뭔지 알아? 같이 꿈을 이야기할 사람. 진짜 딱 그거 하나였는데, 그걸 못해주는 사람을 만났어. 내가... 힘들텐데 어서 자. 난 오늘 지우랑 잘게."
아내는 더 이상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어폰과 핸드폰을 챙겨 아이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또 두통이 밀려온다.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