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레인 Sep 20. 2023

스스로 만든 올가미

chapter 2. 나(자신과의 대화)

episode4.

박격려(과거 그리고 지금)




넌 항상 그런 식이지.
아픈 사람이 내가 아니라 너였어도
그렇게 했을까?


황당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한 감기에 걸린 게 걱정되어

오늘은 좀 쉬는 편이 좋겠다고 한 것뿐인데...


모범순과 박격려은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함께 도서관에 다니며 꿈을 키우던 친구였다.


순간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며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둘은 서서히 멀어졌고 더 이상 서로를 단짝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다.


범순이 쟤는 자기보다 내가 공부를 더하는 게 싫다는 거야 뭐야? 아무리 친구를 경쟁상대로 생각해도 그렇지...


곱씹을수록 얄미워서

생각하기마저 그만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면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도 다.





세월이 흘러 서른이 넘은 박격려에게 가끔 범순의 말이 떠올랐다. 서운하기만 했던 친구의 말뜻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항상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 혹사시키는 건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남들에겐 잘했다 괜찮다 관대하고,

스스로에겐 못했다. 더 잘해라. 하나도 안 괜찮다.

했으니까.


타고 못생긴 음식은 자신이 먼저 먹었다.

남에게 피해 주느니 내가 힘든 게 훨씬 나았다.


그래, 아픈 사람이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나는 아마 꾹 참고 자리에 앉아있었을 거야.

공부가 안 되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받쳐주지 않은 상황에 괴로워하면서 말이야.



실행을 막는 완벽주의

열등함을 회피하다.


잘해야 해.

완벽해야 해.

특별해져야 해.


다그치고 채찍질했다.

열등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무능함을 들킬까 숨어버렸다.


평범한 직장인 말고

반짝반짝 빛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고

티 안 나게 숨어있는 조용한 일 말고

남들이 알아주는 대단한 일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특별함으로 시작한 생기로움은

세상의 평판에 매달려 금세 시들해지기 일쑤였다.

초라한 시작을 넘기기 힘들어

이리 찔끔, 저리 찔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었다.

감동스러운 반응부풀던 열정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에 푹 꺼져버렸다.


그때마다 박격려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내밀었다.


시큰둥한 성과엔

: 좋아하니까 그냥 취미처럼 하는 거야.


그래도 안 돼서 포기하고 싶을 때는

: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야.


그렇게 방치된 기회와 열정들이 얼마나 될까?


박격려은 무엇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다.


하지만 단순히 의지의 부족이라 하기엔

더 깊은 문제가 숨어있었다.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

제대로 못 보여 줄 거면 안 하는 게 낫다는 믿음.


실패가 두려워.. 무능함을 보일 수 없어. 그러니 차라리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사람으로 남을래. 난 원래 특별하고 완벽한데,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데 말이야... 그저 행동하지 않을 뿐이라고!



안쓰러운 자기기만이었다.


정말로 원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가?


정말로 자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없다는 말로 승부를 피하는 것인가?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해보았나?


박격려은 몰래 앓던 고통의 시간을 지나

자신의 밑바닥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이런 질문들에 진지하게 마주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회피하며 살았구나.

그런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구나.



뭐가 그리 잘나서?

평범함을 인정하다.


그녀는 몰랐다.

자신은 절대로 완전할 수 없으며

'나는 옳다'라는 생각은

'내가 옳을 리 없다'로 바꾸어야 한다는 걸.


원래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함을 느낄 때마다 화를 냈으니,

얼마나 지쳤을까.


박격려는 뛰어난 존재가 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했던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나는 반드시 잘돼야 한다는 생각은

강한 자의식이 만들어낸 착각이었고

괴로움의 굴레였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게 인정하면

일 속에 '대단한 나'를 개입시키지 않는다.


내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할 줄 안다.


내가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아. 이런 반응은 용납할 수 없어... 가 아니라 이런 피드백을 받았으니 묵묵히 개선해 나갈 줄 안다.


기대나 서운함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는다. 실패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작은 성취에 기뻐하며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렇게 탄생한 아웃풋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특별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할수록

특별해지는 아이러니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평범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했을 때

드디어 박격려는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맛보았다.


매일 아침 답답하던 가슴이 사라졌고

세상이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줄었으며

불편하던 삶에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사실 그녀가 가장 원했던 것

내면을 살피다.


허위의식 가득했던 내가 창피해.

어쩌다 이렇게 지독한 완벽주의에 시달리게 된 거지?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하신 걸까?

학교와 사회에서 나에게 기대를 많이 했나?


그렇게 살피다가

문득 알았다.


가장 많은 기대를 하고,

가장 많이 다그쳤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


가장 야박했던 나에게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주는 인정과 사랑'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도

그냥 사랑해 줄 수도 있었는데.


나를 사랑하는 일이

나는 왜 이리도 힘들었을까?


꼭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만.




박격려는 다이어리를 펼치다 말고

지금의 자신과

자신의 일을 돌아보았다.


'못한다, 더 잘해라, 할 수 있다...'

매번 속삭였던 말대신


아직은 어색한 말

'잘하고 있다. 나름대로 해내고 있다.'

는 말을 떠올렸다.


수강생이 적다고 시큰둥했는데,

작은 학원 소속이라 부끄러워했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잘하고 있었다.


육아를 하면서도 꿈을 놓지 않고,

짬짬이 공부하고 준비하며

적어도 강의하는 순간을 즐기며

자신과 인연이 닿은 학생들이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괜찮은 과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타인의 칭찬과 격려 없이도,

내가 나를 인정하고 격려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구나.


나를 사랑하는 일이

나는 왜 이리도 힘들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무능한 자신을 보기 힘들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