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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쉽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날

2024년 3월 29일에 얼린소에 올린 글

by 심준경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은 보르헤스의 묘비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사이에는 칼이 있었네."

실명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화자는 그것이 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로 해석하는 연구자의 견해를 전한 후, 화자 자신의 느낌으로는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진실은 나도 모른다. 한강도 모르고, 아마 보르헤스의 묘비명을 써내려갔던 '마리아 고타마'도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절 자체는 끝없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그저 이 문장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늘 있는, 각자 개인이 가진 기억과 인식의 틀, 그리고 순간을 지배하는 감정이 있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지만, 끝없이 서로를 아프게 하는 언어 혹은 사회적 행위, 아니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모든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오늘 새벽부터 아침까지, 끝없이 칼을 휘둘렀다. 미친듯이 휘둘렀다. 무참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신경 쓰이게 했다는 이유로 그 칼을 정말 끝없이 휘둘렀다.

나는 진짜 나쁜 사람이다. 그렇게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을 하면서도, 상대의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끝까지 상대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어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칼부림은 내가 이번 달 내내,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만났을 때부터 지속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내가 했던 착각이다. 나는 그가 굉장히 사리분별력이 강하고, 명민하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아니 어쩌면 그에 투영된 나와 나의 가족의 과거 속에서 나와 나의 가족을 꺼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전혀 이타적이지 않은,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나는 그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며, 아는 것이라고는 내 경험과의 공감대를 통하여 연결시키고 형성시킨 또 다른 인격체일 뿐이다. 내 욕망에 가득찬 행동을 봤을 때, 정말 많이 고마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 나는 정말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나이가 30이 넘어가도 나는 나 자신의 욕망밖에 보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가 내게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로 내 욕망 그대로 행동했다. 욕망에 충실하게 칼을 휘둘렀다. 나는 정말 하찮은 칼잡이일 뿐이었구나.

어쩌면 내 인생은 계속 하찮은 칼잡이로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하찮은 칼잡이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평생을 하찮은 칼잡이로 떠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믿어보려고 한다. 인간은 발전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나의 하찮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고.

나는 왜 착각하고 싶어할까? 나는 왜 욕망할까? 나는 왜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위선을 부릴까?

어마무시하게 내가 싫어져서 그냥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하는 시간들일 뿐이다. 정말 숨이 쉬기가 힘들 정도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와 나의 가족의 과거들로부터 다른 사람을 꺼내기 위한 노력은 칼을 권력자와 사회 구조를 향하여 휘두르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휘두르는 칼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제어하지 못할 수 있다. 권력자나 사회 구조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닐 때에는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칼을 그냥 놔두어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함부로 도와준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칼을 권력자와 사회 구조를 향하여 휘두르더라도, 누군가 입지 않아야 할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할 경우, 최대한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자신을 성찰하기 힘들며, 사회 구조는 “죽은 노동(자본)이 산 노동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처럼 이미 축적되어진 곳에 너무 많은 것이 쌓이게 된다. 그러므로 최대한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전달해야 한다.

일기장이 되어버린 이 글, 보르헤스 묘비명과 희랍어 시간에 대한 글이었야 할 이 글.

하지만 나의 하찮음에 대한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반성문을 삼아 수정을 거듭하였다.


- 24년 어느 날의 일기, 혹은 청년 시절 어느 날들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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