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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녀시대 Jul 04. 2020

어느 산책자의 수기

여자 하정우의 워킹법 

5월 초 자가격리가 풀리고 외출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일과는 찰스강 산책. 5월부터 시작했으니 근 2달이 되어가는 지금 산책이 없는 일상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새벽 5시쯤 눈뜨자마자 부리나케 산책하고 돌아와서 한껏 응축된 시장기를 동력 삼아 아침을 즐기는 루틴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오후 5-6시쯤 석양을 벗 삼아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꽤나 운치가 있다. 


보스턴 와서 제일 놀란 건 실외 인구의 절반은 다 뛰고 있다는 거. 눈이 와도 뛰고 비가 와도 뛰고 해가 쨍쨍해도 뛴다. 가축만 한 커다란 댕댕이는 필수. 요가를 통해 내 안에 숨겨진 운동 자아를 발견했다지만 나는 걸으면 걸었지만 절대 뛰지 않는다. 가늘고 긴 운동을 지향하므로 러닝은 광탈 손절. 신분이 불안전한 외국인 학생이라 반려견 피처링 역시 불가. 그래서 내가 택한 최적의 야외 운동은 걸어도 걸어도 나 홀로 산책! 


어디 가서 칩거력 하나는 뒤지지 않는 자타공인 집순이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 사회생활이 철저히 단절된 비자발적 자가격리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렇게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바람이라도 쐴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덥지만 웅크리지 않을 정도로 따듯해진 날씨에 한번 더 감사한다. 산책과 경보의 중간쯤에서 일일 3시간 걷기를 꾸준히 실천하며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심신취약을 다잡을 수 있었다. 


산책도 하다 보면 중독성이 있어 신나게 무아지경으로 걷다 보면 탈진 상태가 되곤 한다. 특히 겁도 없이 폭염에도 개의치 않고 행군하다가 일사병에 걸려 몸에 알레르기 돋아, 가벼운 두통구토 증세로 밤새 앓아눕기도 몇 번. 이제는 나름의 요령이 생겨 산책 레벨도 쪼렙에서 만렙으로 시나브로 진화 중.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고안한 세 가지 원칙으로 오늘도 여자 하정우의 워킹은 절찬리 탄력을 받고 있다.  



1. 아이폰 노터치

스스로 활자중독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독서량이 많지 않다. (게을러서가 절대 아니다) 대신 듣기량만큼은 엄청나다. 뭐라도 브금으로 틀어놓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오디오에 의존한다. 주로 팟캐스트를 많이 듣고 오디오북도 계속 시도는 하고 있으나 한두 챕터 찝쩍거리다 팽한 타이틀만 해도 수백 개일 거 같다. 오디오북은 조금만 딴생각을 해도 흐름을 놓치기 일쑤라 30분 내외의 짧은 시사 팟캐스트를 주로 듣는다. 


내 산책 루트는 찰스강가 고정 구역을 왔다 갔다 6-8번 반복. 구간을 왕복하는 3시간 동안 들을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정렬해놓은 다음 힙색에 아이폰을 고이 넣고 산책이 끝날 때까지 꺼내지 않기...가 내 원래 취지인데 3시간 동안 카톡은 물론 폰 체킹을 일절 안 하는 게 아직까지는 투머치라 적어도 1번 왕복할 50분 동안만큼은 삼가는 정도로 스스로에게 숨 쉴 구멍을 주고 있다. 근데 지금 내 처지에 3시간 폰 확인 안 한다고 해서 긴급 상황을 놓칠 확률은 극히 희박하므로 이 정도도 못 참는다는 건 실상 핑계다.

팟캐스틑 스티쳐로, 오디오북은 리비가 나의 고우투 앱이다. 다. 리비는 공공도서관 멤버십으로 해당 도서관의 이북 및 오디오북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한



2. 선크림 챱챱챱

타고나길 하얀 피부이(였)고 원래 야외 활동량이 거의 없는 편이라 얼굴을 제외한 몸까지 선크림을 발라야 할 이유도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래서 여기서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선크림 프리로 나갔다가 화상 아닌 화상까지 입었다. 이제는 경각심을 갖고 선크림으로 노출 부위를 꼼꼼히 처발해서 완전 무장을 하고 나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 목과 팔은 얼룩덜룩해진 지 오래고 피부 하얗다는 소리는 이제 다음 생에서나 들을 수 있을 거 같다. 


까매진 피부야 그렇다고 치지만 (잘하면 겨울에 다시 하얘질 수도 있다) 얼굴에 낀 기미는 이제 평생 안고 가야 할 애물단지가 되었다. (레이저 간절하다) 유전적으로 트러블이 나면 났지 기미는 없는 피부라고 생각했는데 자외선은 유전자에도 없던 기미 주근깨도 가능하게 만든다. 산책하는 데 선크림 바르는 게 먼 놈의 원칙이냐, 개나 소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니냐 하겠지만 나로선 화상/기미/주근깨/얼룩과 맞바꿔 얻는 금과옥조다. 



3. 히얼 앤 나우 

산책은 타이밍이다. 날씨가 괜찮고 마음이 동했다 싶으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앞뒤 재지 않고 그냥 나간다. 이럴 땐 3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원칙 따위에 굳이 연연해하지 않는다. 한 바퀴만 돌아도 그냥 발만 찍고 와도 괜찮다. 잠깐이라도 기분 전환이 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첫째도 유도리, 둘째도 유도리, 셋째도 유도리라는 쿨내를 풀풀 진동하며 산책이 일상의 또 다른 의무가 되지 않고 휴식이 되도록 융통성을 발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원칙도 아니고 나에게 바라마지 않는 간절한 염원이랄까. 제발 카드는 두고 무조건 맨몸으로 폰만 들고나가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꼭 귀갓길에 슈퍼에 들러 쓸데없는 장을 보고 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세일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또 필요 없는 옷가지를 사고 앉았으니 스스로 한심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기껏 산책으로 게워낸 멘탈이 또다시 잉여로 채워지는 김 빠지는 관성의 저주. 그래도 어제오늘은 실천에 옮겼으니 이것도 나름 고무적(이라고 믿고 싶다). 여자 하정우는 이렇게 산책으로 인간이 되어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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