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눌리(鳥訥里)
새 鳥에 말 더듬을 訥, 조눌리는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이다.
원래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새 너리'이다.
사철 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보금자리를 틀기도 하고 쉬었다 가기도 하는
'너리'(들)이란 뜻이다.
윗마을 이름은 강모래가 퇴적된 지역이라고 하사지(河沙地), 아랫마을은
기러기가 보금자리를 튼다는 기우막(안막, 雁幕)이다.
낙동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한 지역이라 사철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끓임
없이 찾아왔다.
겨울철엔 청둥오리, 기러기, 고니 등이 북쪽에서 추위를 피해 날아왔고 여름철엔
백로, 왜가리 등 여름 철새가 둥지를 틀고 개체 수를 늘려 가는 곳이었다.
어떤 날에는 수천 마리 까마귀 떼가 날아와 며칠간 하늘을 까맣게 디 덮고 소란을
피우다 사라지기도 했다.
이렇게 찾아오는 철새들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호기심에서 벗어나 서서히
사냥감 대상으로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했다.
여름에 날아오는 철새들은 대부분 흰색을 띠고 있어 어른들이 길조라며
함부로 잡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겨울 철새들은 대부분 오리 종류라 어려웠던 당시의 우리들 빈약한
식탁에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야생 조류의 포획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있지만 50년대에는 이러한
제약이 전혀 없었다.
겨울 철새인 오리나 기러기 종류는 어두워지면 둑 너머에 있는 강가 밀밭에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잤다.
이곳은 토사가 밀러와 조성된 거친 밭이라 늦가을에 밀이나 호밀 씨앗을 뿌려놓는다.
그러면 한 겨울에도 날씨가 조금 풀리기만 하면 파란 새순이 돋아난다.
이 새순이 철새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밤이 되면 철새들이 여기를 거의 매일 밤
찾아와 잠을 잔다.
농사를 매년 망쳐놓는 이 철새들을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소탕은 못하더라도 몇 마리를 포획하여 철새들에게 엄중한 경고는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른들은 가끔 허수아비를 만들어 밭 한가운데 세워 놓기도 하지만 효과는
잠시뿐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으로 고안해낸 방법은 마른 낚시, 당시 갈치를 어물전에서 사게 되면 갈치
입속에는 항상 커다란 낚시가 들어있었다.
이 큰 낚시를 여러 차례 꼰 실로서 고정을 시키고 낚시에 오리가 좋아할 고구마 등
적당한 유인 미끼를 달아 놓았다.
일반적으로 오리 종류는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줄 알았는데 영리한 오리나 기러기는
항상 미끼만을 잘도 빼어 먹었다.
방법을 바꾸어 이번에는 집에 있는 족제비 틀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당시 시골에는 족제비가 많았다.
닭이 족제비의 하위 먹이사슬이라 닭을 키우는 집에는 대부분 족제비 틀이 있었다.
30 x 50 x 100cm 정도의 크기로 기본 틀은 나무로 만들고 입구 반대편은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 입구 문을 열어놓고 틀 한가운데 먹이를 넣어 놓는데 포획 대상 짐승이
들어가서 먹이를 건드리면 입구 문이 자동으로 닫치게 설계되어 있다.
유인 먹이도 바꾸어 보기로 작정을 하였다.
어른들로부터 오리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는 민물고기라는 사실을 뒤 늦게 알아냈기
때문이다.
첫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한 겨울에 얼어붙은 개천의 얼음을 깨고 민물고기를 잡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어둠이 내린 후 족히 1km 이상 떨어져 있는 강가 밀밭까지 무거운 족제비 틀을 옮겨
놓는 일이 어린 나에게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지게로 이 틀을 운반했고 이를 지켜본 어른들은 나에게 정신 나간 짓을 한다고
혀를 차대기도 했다.
이러기를 수차례 이른 새벽 찬 공기를 맞으며 강가로 달려가 보았지만 번번이 빈 통만
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족제비 틀의 구조가 주둥이로 먹이를 먹는 철새들을 포획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던
것 같았다.
실패만 거듭하다 결국엔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고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첫째 두 번째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로 시도한 방법은 일반 가정에서 쥐잡이 용으로 많이 사용했던 쥐잡이 틀
즉 쥐덫이었다. 강한 스프링이 장착된 동그란 모양의 이 장치를 벌려 놓고 가운데에
미끼를 올려놓는다.
미끼를 먹기 위해 올려놓은 먹이를 건드리면 스프링이 작동하여 대상 동물의 신체
부위가 틀 속에 걸려들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 장치이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내 성에는 차지 않았지만 청둥오리 두 마리 정도는 잡을 수가 있었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으면서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대처인 부산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면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지만 참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며칠이 되지 않은 어느 날 하굣길에 새로 만난 친구 집에
놀러 갈 기회가 있었다.
친구 집은 폐기된 군용 자동차 부품을 수거하여 재생하여 되파는 소규모 가내 사업을
하고 있었다. 큰 가게 한편에서 녹슬고 기름이 굳어있는 여러 가지 자동차 부품들을
큰 솥에 넣고 삶고 있었다.
하도 궁금하여 가까이 가보려고 했더니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강하게 접근을 금지시켰다.
'청산가리를 '사용하여 폐기 부품에 붙은 불순물을 녹여내기 때문에 뜨거운 물 못지않게
나오는 증기 가스마저도 상당히 위험하다고 했다.
"청산가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외지인들이 들어와 이 흰 백색가루를 이용하여 야생 동물을 잡는 현장을 나는
수차례 목격했었다.
친구를 설득하여 어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 가루를 조금, 정말 조금 친구의
도움으로 몰래 훔쳐서 숨겨 가지고 왔다.
이 위험한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주말을 이용해 고향으로 급히 달려갔다.
사용하는 방법은 오래전 어른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봐 두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작업은 골방에서 정말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양초를 녹여 촛물을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만든다.
촛물이 굳어지기 전에 핀센트로 이 가루를 극소량 찍어 촛물 속에 넣은 다음 다시
촛물을 덮어서 굳힌다.
다음은 전과같이 냇가에 가서 피라미를 잡아 아가미 속에 굳어진 이것을
하나씩 집어넣는다.
한 삼십여 개 만들었을까?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강가 밀밭으로 나가 적당한 장소에 여기저기 뿌려 놓았다.
다음날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 강가로 나가 보았다.
"악"
밀 밭 전체가 쓰러진 청둥오리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나서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생각이 제대로 나질 않고
막막하기만 했다. 이럴 때는 나의 구세주인 외삼촌을 찾아가서 일어난 일을
이실직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웃에서 정미소를 관리하고 계셨던 외삼촌은 말없이 큰 지게에 지고 따라오셔서
사후 정리를 모두 깔끔하게 해 주셨다.
"덕아!"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오리도 죽이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
외삼촌께서 죽은 오리들을 안전하게 처리를 하여 이웃집에 한 마리씩 나누어 주셨다.
이후 가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이웃집 할머니들이 영문도 모르시고
"덕아!"
"요새(요즈음)는 오리 집으러 안 가나?"
'??? "
정말 겁 없이 무모한 짓을 했던 지난날의 일을 뒤늦게 후회하며 참회한다.
"철새들아! 아니 청둥오리야! 미안하다."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내가 용서를 빌게,,,,,,,,"
2015년 1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