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죽
소한을 지나고 나니 연일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요즈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겨울나기는 옛날 구중궁궐의 황제보다
더 호사스럽고 평안하다.
임금 같은 호강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내 온도가 섭씨 20도 이상이 되면
온몸이 간지러워지고 특히 밤에는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반면 아내는 23도 이상이 되어야만 겨우 추위를 느끼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때론 "시골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라는 등 듣기 싫은 핀잔도 가끔 늘어
놓는다.
이럴 때마다 이 모두가 어릴 때 단련된 덕분이라며 말을 막는다.
동지 전후 집안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면 한 겨울
동안 우리들이 당당해야 할 가사가 두 배로 늘어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라는
선친의 불호령에 따라 어린,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나에게 주어진
주 과업은 매일 아침저녁 쇠죽을 끓이는 일이었다.
농한기 즉 겨울에 소를 잘 먹여 놓아야만 농번기에 제대로 부려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쇠죽의 주 재료는 짚과 고운 쌀겨
그리고 밥할 때 쌀이나 보리쌀을 씻은 구정물이다.
어둠도 채 가시지 않은 겨울날 이른 아침, 새벽 기도에 다녀오신
아버님은 어김없이 나를 깨운다.
"경덕아! 얼른 일어나 쇠죽 끓이라"
툇마루를 돌아 쇠죽을 끓이는 전용 부엌이 집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 날 밤에 부어놓은 구정물로는 언제나 부족하다.
부족한 물을 채우기 위해 바켓을 들고 동네 앞 웅덩이로 물을 길으러 나간다.
두 번 정도 다녀와야만 쇠죽을 끓이는 가마솥에 물을 2/3 정도를 채울 수가
있었다. 추운 새벽 날씨에 어린 체격에 비해 상당히 큰 바켓을 들고 물을
길어 오는 일은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일차로 짚 불을 약 30분 집히면 물이 끓는다.
다음에 작두로 미리 썰어 놓은 짚을 끓는 물속에 가득 넣고 고운 쌀겨
두서너 바가지 정도를 위에 뿌려준다.
다시 불을 집혀서 한소끔 끓인 후 "ㄱ' 형의 낫 같은 도구로 고르게
썩이도록 뒤집어 준다.
다시 다음 한 번 더 불을 때어 뜸을 들이면 일단 쇠죽 끓이기가 끝이 난다.
전체로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였다.
한숨을 돌린 후 이 뜨거운 쇠죽을 펴서 마구간에 있는 구유에 옮겨 놓아야만
아침 식전 과업이 끝난다.
하루에 한 번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 떨어지기 전 즉 저녁에도
아침과 똑같은 과업을 수행해야만 저녁을 먹을 수가 있었다.
지금 그때 내 나이 또래의 손주들과 비교해 볼라치면 정말 세월의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비교적 남보다 건강하게 지금 이 나이 70 생을 잘 살아왔다.
나의 신체 중 가장 약한 곳이 있다면 호흡기 계통 특히 기관지이다.
어릴 때 아침저녁 쇠죽을 끓이면서 너무 장시간 먼지에 노출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특히 짚 불로 쇠죽을 끓이는 과정이 얼마 후 왕겨로 바뀌어 버렸다.
선친께서 정미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왕겨가 매일 지천으로 솟아져 나왔다.
아궁이에 풍로를 설치한 후 오른손으로 풍로를 돌리고 왼손으로는
약 10초 간격으로 왕겨를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화력은 짚 불 못지않게 좋았지만 먼지는 몇 배로 더 심하게 일어났다.
쇠 죽을 다 끓이고 나면 항상 나의 머리에는 먼지가 보얗게 쌓여 있었다.
시절이 시절인 지라 이런 일로 건강을 염려하던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느 해부 터인가 이 쇠죽 끓이는 일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친이 야단을 치시면서
"공부하기 싫으면 일이라도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때부터 작심을 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을 점차 늘어나가기 시작했다.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도와라는 선친의 명령도 따라서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처의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지긋지긋한 쇠죽 끓이는 일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결과론으로 치면 일하기가 싫어서 특히 쇠죽을 끓이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덕분에 비교적 어린 나이인 13살부터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공부하기 싫으면 일이라도 해라!"
선친께서 하셨던 이 두 마디는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며
남아 있다.
하나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잘 찾아보면 비록 70대 노인이지만 주변에 할 일이 지천으로 덜려있다.
비록 돈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2016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