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mit House
무엇을 먹어야 하나?로 고민하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이제는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나?로 고민을 해야 할 시대로 들어선
것 같다.
미용과 다이어트, 건강 문제로 넘어가면 웬만한 사람들도 전문가
못지않게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나 식재료 이름을 줄줄 나열할 줄 안다.
학창 시절 당시 하숙집 먹거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열악했다.
잇몸에 자꾸만 피가 나서 치과를 찾아갔더니 치과의사가 이것저것
먹는 음식 특히 반찬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의미 있는 표정을 지으시며 빙그레 웃으시더니 내리는 처방이 참으로
독특했다.
'학생, 치료비는 얼마 가지고 왔어?'
'오천 원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진료비는 받지 않을 테니 이 돈으로 용두동 시장에 가서
돼지뼈가 들어간 감자탕이나 순대를 며칠 사 먹어봐!
'그런데 막걸리는 절대 마시지 마!'
당시 신설동 로터리에 있었던 민** 치과의 멋쟁이 원장님이 영양이
부실한 우리 같은 하숙생들에게 내린 기발 난 처방이었다.
잇몸병은 영양 결핍으로 인한 괴혈병이었다.
처방해주신 대로 며칠간 시장에 나가 감자탕과 순대를 열심히 먹었더니
거짓말같이 잇몸에 나던 피가 멈추고 회복이 되었다.
남쪽 출신들은 어릴 적에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인지 대부분 순대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후 순대의 가치와 맛에 푹 빠져들어 틈만 나면 이곳저곳 순대 잘 만드는
집을 찾아다녔다.
최종으로 낙점한 장소는 동대문 광장시장 내 노천 먹자골목이다.
순대를 즐기기 시작한 얼마 후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학생 신분 시절이라 만나면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당시의 기본 데이트 코스였다.
그런데 혼자서만 가만히 찾아갔던 광장시장 순댓집이 자꾸만 같이
오라고 무언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공부(?) 하느라 영양이 부족하여 허기져 있는 배가 이와 같이
가성비가 뛰어난 순대를 주기적으로 찾고 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부끄러움 많은 아가씨를 모시고 광장시장을 찾아갔다.
어리둥절해하며 졸졸 따라오더니 내가 좌판에 들썩 주저앉자마자
깜짝 놀라며 돌아서 버린다.
가던지? 말던지?
나는 순대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잔을 꼭 먹어야겠다.
곁 눈길로 보니 멀리 가지는 않고 저만치 전봇대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L.A, 옛날 유전이 있었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레스토랑이다.
이름하여 Summit House.
옛 유전 주인의 개인 저택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하여 놓았기 때문에 주위가
웬만한 공원보다도 더 넓고 아늑한 고급 레스토랑이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너머로 레이스로 멋지게 단장을 하고 있는
커다란 격자창이 정말 멋이 있었다.
메뉴판에서 가장 값비싼 Steak 코스를 골라 medium rare로
주문을 한 후 와인 잔을 폼 나게 들고 허세를 부려본다.
와인잔에 가려서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보이질 않았다.
대신 격자창 너머에 있는 전봇대가 눈에 불쑥 들어왔다.
그 뒤에 배시시 웃고 있는 아내의 옛날 얼굴이 보인다.
웨이츠 레이스가 식탁 위에 올려준 Steak 가 갑자기 순대 접시로
변해버렸다.
투명한 와인잔은 투박한 막걸리 잔으로 변하고......
그리곤 들려오는 한마디.
'여긴 너네들 놀 집이 아니야!'
'빨리 광장시장으로 가보라고!'
2018년 1월 17일
in 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