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뎅 즉 어묵은 우리나라 전통 음식이 아니다. 이름 그대로 일본에서 건너와 우리나라에 토착화된 전래 음식이다. 일본의 전통 오뎅은 다양한 종류의 다시(국물류) 속에 들어가는 종 즉 가마보코(어묵), 무, 두부, 달걀 야채 등을 통칭한 하나의 요리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복잡한 전후 좌우를 모두 제거하고 주 재료인 가마보코 하나만를 두고 오뎅이라고 부른다.
이 오뎅의 주 재료가 생선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수산물의 최대 집산지인 부산이 자연스레 오뎅의 본 고장이 되었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의 전통 재래시장에는 오뎅을 직접 만들어 파는 집이 한 집 이상 시장 안에 있었다. 요즈음 유명세를 타고 있는 부산의 삼* 어묵도 당시 부산 부평동 재래시장 안에 있었던 그런 어묵집 중 하나로 알고 있다.
며칠 전 고향 부산에서 서울로 함께 올라와 대학 동창이 된 친구와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지루하게 지속되는 장마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옛날 성장기 우리의 허기진 뱃속을 채워주던 부산의 오뎅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4.19 전 해부터 65년까지 6년 동안 부산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고향 김해의 동쪽 지역 대부분 부산시에 편입이 되었고 새로운 도로가 많이 개설되어 교통편이 여느 부산 시내와 다름이 없다. 그 당시는 구포가 부산시에 편입되기 전이였다. 부산 가는 시외버스가 구포에서부터 있기는 했으나 운행 횟수가 많지 않았고 요금도 비쌋다. 그래서 부산에 적을 둔 학생들은 주로 열차를 이용하여 부산까지 통학을 하였다. 이름하여 '열차 통학생' , 모범, 불량 학생으로 구분도 하기도 전에 요주의 인물 내지는 기피 학생이라는 이름표를 항상 가슴에 달고 다녀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열차는 아침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등교용 한편, 저녁에 마산으로 올라가는 귀가용 한편 단 두 편 뿐이었다. 학교에 가려면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 구포역 까지는 약 6.7km,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자동차로 직접 측정해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만 1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구포역을 7시 5분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나면 학교와 가장 가까운 역에는 오전 8시 도착한다. 다시 여기서 30분을 더 잰걸음으로 걸어가야만 학교에 닿을 수 있다. 같은 길을 저녁에는 역으로 되 둘아오면 된다. 왕복 5시간이 소요되는 등하교 길이였다. 지금 학생들처럼 하루 5시간을 학원에 다녔더라면 한 가지쯤은 도가 터였을 터인데.... 왜 오뎅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열차 통학 이야기로 빠져버렸냐고요? 다 연관이 있어서 서설이 조금 길었네요.
이른 새벽 항상 농사일에 분주한 어머니가 챙겨주셨던 김치 국물이 간혹 흐르기도 하는 뻰또(양철도시락) 하나를 가방에 넣고 서둘러 등굣길에 나서야 했다. 이 도시락은 점심시간 즉 12시까지 버티질 못하고 항상 일찍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열차 시간 오후 5시 45분 까지 아니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저녁 8시 까지는 어떠하든지 버티어야 한다.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던 16,17살 한창 성장기 나이 때였다. 농촌에서 생활을 하셨던 당시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간식이나 용돈이란 용어 자체를 모르고 사셨던 분들이다.
밥 세끼만 거르지 않고 제대로 찾아 먹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주머니 속에 매일 허기진 배를 채워 줄 만한 여유 용돈이 들어 있을리라 만무했다. 요령껏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거나 시체 말로 삥땅을 쳐서 주머니에 푼돈이 있을 때가 간혹 있기는 했다. 열차 통학생들은 항상 자기 방어 습관으로 두서너 명 짝을 지어 다녔다. 몇 푼 주머니에 돈을 지니고 있더라도 섣불리 꺼내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서너 명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넉넉한 돈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하굣길에 좁은 범내골 시장통 길을 지나갈 때이다. 이 길은 아침저녁으로 매일 지나가는 길이다. 평소에는 별로 관심 없이 지나치기만 했는데 그날따라 오뎅을 직접 만들어 파는 조그마한 가게가 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방과 후 운동을 조금 격하게 한 때문인지 상당히 배가 고팠다. 이 가게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코를 항상 불편하게 했다. 한컨에서는 선도가 제법 떨어져 역한 비린내가 나는 잡어들을 물에 담가 놓고서 적당히 씻어 내고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떡가래 뽑는 기계가 이 잡어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다음 몇 번 분쇄가 되어 걸쭉하게 된 생선 반죽에다 밀가루와 약간의 첨가물과 소금을 넣은 다음 기계 속에 다시 넣어 몇 번을 더 돌려내었다. 마지막으로 널따란 판 위에 반죽을 올려놓고 기다란 젓가락으로 현란한 솜씨를 발휘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뎅을 만든 다음 끓는 기름 가마 속에 집어넣고 잠시 튀긴 다음 건져서 기름을 걸러 낸다. 당시 튀김용으로 사용한 기름은 지금 같은 정재한 고급 튀김 기름이 아니었다. 아마 미국에서 구호용으로 들어온 돼지 비게 기름 즉 쇼팅유 같았다. 수재용 구호품으로 쇼팅유 한 통을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 기름의 이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모두 합쳐진 오뎅집에서는 과연 어떤 냄새가 풍길까? 그러나 그날은 평소에 지나칠 때보다는 내 사정이 많이 달랐다. 우선 너무 허기가 졌다. 그리고 호주머니에는 약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오뎅을 만드는 가게는 음식점이 아니다. 직접 만든 가마보코를 음식재료로 팔기만 하는 곳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 오뎅 가게로 다가갔다. "아저씨, 이 오뎅 어떻게 팔아요?" "학생이 먹으려고?" "네, 저 자취생인데요." 대답할 말이 적당치 않아서 즉흥적으로 적당히 둘러 대었다. 당시 역전에서 먹을 수 있는 가락국수 한 그릇 값을 내놓았는데주인아저씨가 우리를 불쌍히 보았던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오뎅을 헌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 주셨다. 금방 신문지에 기름이배어 나왔다. 상관없었다. 가방 가운데 적당히 끼워 넣은 다음 체면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생 오뎅을 씹어 먹으면서 역으로 걸어갔다. 한 사람밖에 먹을 수 없는 적은 돈으로 친구와 함께 아주 배 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다. 맛은 고사하고 먹고 난 후에 어쩌나 뱃속이든든하던지 어느 먹거리를 먹었을 때보다 포만감이 오래갔다. 그 이후로 우리 같은 통학생들에게는 이 오뎅이 주요 간식거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요즈음 말로 치면 가성비가 제일로 높았다. 단백질이 절대 부족한 시절 불쌍한 우리 통학생들의 발육을, 비록 위생 상태는 엉망이였지만, 오뎅이 도와준 꼴이 되었다. 배를 주릴 때 간간히 먹은 오뎅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먼 길을 잘도 걸어 다닐 수가 있었다.
공부는 언제 했냐고요? 짬짬이 열심히 했고 그리고 곧 잘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통학생들을 사잡아서 건달 내지는 깡패라고 부를 때는 많이 억울하기도 했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렇게 힘들었던 통학길에 허기를 달래게 해 준 그 옛날 그 오뎅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맛을 내는 옛날 오뎅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다. 생선 뼈가 간간히 씹히기도 하고 한물간 생선 냄새에다 쩔은듯한 싸구려 튀김 기름 냄새를 물씬 풍겼던 오뎅이다. 그렇지만 그 오뎅이 지금 까지 나를 건강하게 지켜 주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펏던 추억이 갑자기 고마움으로 변하여
내게로 다가왔다.
2020, 8,10 폭우가 하루 종일 내린 날
P.S 그 당시 통학길에 함께했던 죽마고우요 고교 동창이기도 친구는 작년 초 먼저 이 세상을 떠나서 지금은 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