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카톡으로 보내주는 캐럴 동영상을 짬짬이 보고 듣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냥 보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아쉬워서 어제 조그마한 장식물을 식탁 옆 벽에다 설치하였다. 조그마한 변화인데 갑자기 집안이 환해졌다. 우울했던 기분도 갑자기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다. 누군가를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놓고 빛깔 좋은 와인 한잔을 함께 마시고 싶어 졌다. "여러분! 모두 초대합니다." "우리 집에"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갑니다.
어릴 때는 대부분 사람들은 성탄절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보다는 성탄절이란 단어가 더 입에 쉽게 오른다. 우리는 성탄절 한 달을 앞두고 저녁마다 교회에 모였다. 성탄절 축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처럼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송판으로 바닥이 깔려있던 시골 교회였다. 틈 사이로 찬바람이 그대로 올라왔다. 다행히 장작이나 석탄을 사용하는 무쇠 난로가 예배당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교회에서 난로용 장작을 매일 저녁 공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각자 집에서 나무를 가져와야만 불을 땔 수가 있었다. 정전이 잦은 시절이라 별도의 조명등도 준비해 놓아야만 했다. 직경 40cm 정도인 유리로 된 흰 갓이 멋지게 머리에 쉬워져 있는 석유등이었다. 우리는 이 등을 당시에는 일본 이름 그대로 '호야'라고 불렸다. 이 등불용 석유는 집이 가까운 내가 거의 전담하다시피 준비하였다. 그때 호야의 작은 기름통에 석유를 붇는 연습을 많이 하여서인지 지금도 병에서 병으로 무슨 액체든 옮겨 붇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문화시설이 열악했던 6.25 직후인데도 우리들은 이때에 많을 것을 배웠다. 노래는 기본이고 합창, 연극, 무용에다 크리스마스 장식 요령 등 교회 선생님을 따라 흉내를 내면서 학교에서 미쳐 접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교회에서 익힐 수가 있었다. 공연 당일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 위해 선의의 경쟁도 해가면서... 방한복은커녕 내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였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구멍이 뻥 뚫린 면양말을 신고 재미와 열정 하나만으로 추위를 이겨내며 밤마다 함께 모여 성탄절 공연 준비를 하였다.
크리스마스 츄리는 어른들이 뒷 산에서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를 가져와 교회 설교단 양 옆에 설치해 놓는다. 장식은 우리들 몫이다. 하굣길에 주워 온 솔방울, 씨레이션 깡통으로 만든 종, 비료포대 종이로 만든 낙타와 양들, 집에서 엄마 몰래 훔쳐 온 흰 솜은 츄리에 내린 눈이 된다.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한 장식은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품 속에 들어있던 크리스마스 카드다. 지금과 같은 반짝이는 조명등은 상상도 할 수가 없던 시절이다.
이렇게 준비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로 삭막해진 이 땅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