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두 야돌 영감이 마당쇠 노릇하며 겨우 호구를 연명하다 오늘은 주인 마담 봄 나들이에 따라나섰다. 남도에 상륙했다는 각종 매화의 암향을 직접 느껴 보려고 나선 길이다. 마치 젊은 시절 첫 데이트할 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서해까지 밀러 왔다는 중국 발생 황사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첫 목적지인 구레 화엄사를 향하여 아침 일찍부터 자동차 액셀을 힘차게 밟았다. 미세 먼지와 황사를 내심 걱정했는데 하늘이 예상보다는 맑고 푸르다. 차령산맥을 넘어 대전을 지나고 나니 대지의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졌다. 드문 드문 눈에 들어오는 냇가의 수양버들이 벌써 연녹색 속치마를 바꾸어 입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기온이 거의 15•c를 넘어 겨울 방한복을 입고 왔더라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화엄사 주차장에 들어서니 상춘객이 분비지 않고 아직은 한산했다. 일주문을 넘어 가람 속으로 들어가니 멀리 대웅전 지붕이 올려다 보이고 그 끝자락에 홍매가 머리를 살짝 내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화는 내공이 깊어 그 해의 개화 시기는 지나간 겨울 날씨에 의해 결정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개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귀매는 상견할 수 있는 적기를 맞추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였다. 멀리서 보아도 우리는 때 맞춰 찾아온 것 같았다. 백양사 홍매, 별칭 흑매는 남도 5매 중 하나다. 수령이 사백 년이 넘어서인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오랜 연륜의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시진으로 홍매를 보고서는 때깔이 너무 화려해서 마치 선술집 작부처럼 보인다고 혹평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부터 그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전체 색깔은 분명히 붉게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니 꽃잎 속에 은근한 흑색이 깊게 들어있다. 그래서 흑매라고 부르나 보다. 흑매의 은은한 암향이 소리 없이 아침 산사를 뒤덮고 있다.
매화 4 귀중 하나인 '꽃은 천하고 봉우리는 귀하다' 고 하였는데 마침 2/3쯤 개화가 되어 있어 귀한 봉우리까지 모두 볼 수가 있었다. 흑매를 뒤로하고 여기서 한 마장쯤 떨어져 있는 구층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암자 뒤편에 들매 즉 야매 몇 그루가 자생하고 있었다. 문외한이 보면 그냥 지나쳐 버릴 야생 꽃나무 일 뿐인 것 같은데 다행히 식자들에게 발견되어 지금은 보호수로 소중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 잡아서인지 빈약하게 듬성듬성 가지에 달려있는 작고 흰 꽃들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나무 역시 매화 4 귀 중 하나인 '많은 것은 천하고 작은 것은 귀하다'라는 말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귀한 매화이다.
야매라서 그런지 품어내는 향이 깊고 우아해서 각종 매화 중에서 이 매화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오히려 아래쪽에 처 놓은 다음 주 야매 흑매 사진전 행사를 홍보하는 화려한 현수막이 더 초라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