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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경덕 Mar 24. 2021

수덕사 기행

수덕사
1967년 대학가는 년 중 이어진 데모 때문에 지쳐 있었다. 격량 속에 휩쓸린 그 해는 어떤 결실도 거두지 못하고 저물어다.
연말이 다가오자 혈기 왕성한 21살 젊은 청년에게는 한 해의 무의미한 삶과 정신적 공허감이 무거운 짐이 되어 다가왔다.
겨울 방학이 되었지만 크리스마스 때 까지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은 교회 청년들끼리 어울리는 속칭 올 나이트 모임에 참석해 보았지만 짝이 없는 나를 더욱 초라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날 오후부터 서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함박눈이라 그만 마음이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내려가기로 한 부산행을 뒤로 미루고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수덕사로 발길을 옮겨 버렸다.
무작정 서울역으로 나가 장항선 열차를 탔다.

수덕사와 가장 가까운 삽교역에 내리니 내리던 눈은 그 사이 폭설로 변해 있었다. 오후 3시경 삽교에서 수덕사행 시외버스를 간신히 탔지만  버스는 덕산에서 그만 멈춰 다. 폭설 때문에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내리는 눈을 피해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초가집 지붕인 그야말로 시골 다방이었다.

다방 한가운데는 왕겨를 태우서 난방을 하는 커다란 난로가 자리하고 있었 별로 정갈해 보이지 않는 한복을 입은  중년 마담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폭설이 내리니 차편도  끓어지고 지역 손님도 밖으로 나오지 앓아서 인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는 학생은 어디서 왔으며 여기에 왜 왔는지 따지듯이 캐묻기 시작했다.
수덕사에 며칠 쉬러 왔는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버렸다고 하였더니 호들갑을 떨며 수덕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스님 두 분이 다방 안으로 눈을 털며 들어다. 마담과 인사를 나눈 후 주고받는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어보니 이분들은 수덕사에서 나온 스님 같았다.
다짜고자로 스님들에게 지금 수덕사에 올라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한 스님이 눈길이라도 절에 꼭 올라가고 싶다면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걸어서 가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였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서라도 스님을 따라 수덕사에 올라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따라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은 그쳤지만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전인미답의 시골 눈길을 두 스님을 모시고 말없이 걸어간 그때의 환상적인 밤 길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수덕사 입구에 도착하자 스님이 여관을 소개해 주었다.

그 여관이 바로 유명한 수덕여관이다. 일주문 바로 앞에 자리한 이 여관은  ㅁ 자 형의 단층 초가집으로 건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깨끗하고 단정했다. 재불 화가였던 이응노 화백의 친필 돌 현판이 입구에 놓여 있었고 후에 듣기로는 이 화백의 부인이 당시 이 여관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날 밤 고즈넉한 눈 덮인 덕숭산 사바세계에 여장을 풀었다. 초 저녁에 잠깐 그쳤던 눈이 한 밤중에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던 모양이다.  
한밤 중에 난생처음으로 산에서 피를 토하는 듯 한 산 울음소리를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골 출신이라 웬만한 자연의 소리는 구별할 줄도 알고 대응하는 능력도 어느 정도 고 있었다. 거기다가 잠자리가 바뀌더라도 잠을 잘 자는 편이다.
그런데 그날 밤은 괴이하게 들려오는 이 산의 비명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마치 아주 커다란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까이서 산사태가 나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에 나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대고 있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인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한마디 하였다.
"학생, 별일 아니여, 언 들어가 자!
 눈 뗌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린 ."
노송은 사람보다 설화를 더 두려워한다는 은 들어보았지만 이날 밤 현장에서 체험하기는 처음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내린 눈은
무릎을 훤씬 넘길 만큼 높이 쌓여 있었다.
전날 이곳까지 안내해준 스님을 찾아 수덕사 요사체로 눈길을 헤치고 올라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스님은
눈이 많이 쌓여 있지만 수덕사 본체 뒤에 있는 정혜사에 한번 다녀오라고 하셨다. 본당을 돌아 1km 남짓 올라가면 있는 덕숭산 8부 능선에 자리한 다른 산사이다.
올라가는 길에는 만해 스님의 기념비인 만공탑도 있었다.
당시 손 때가 묻지 않았던 정혜사 앞 뜰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아직도 내 눈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눈 덮인 덕숭산 남쪽 자락과 건너편에 있는 용산 암봉들 그리고 충청도 길지인 내 들판과 아스라이 눈에 잡히는 서해바다의 경치는 정말 가관이었다.
이후 이를 잊지 못해 몇 번 더 이곳을 찾아갔지만 그때의 감흥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오후에는 스님의 귄 유로 당시 수덕사 일주문 지나자마자 있었던 한 암자에 홀로 머물고 계시던 일엽 스님을 찾아갔다.
폭설 속에 찾아온 손님이라면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 놓으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다. 다른 이야기는 기억의 뒤안길에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것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장부가 여자를 택할 때는 우선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하고 결심이 서고 나면 목숨을 걸어라"라고 하셨다.
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시면서 언제든지 시간이 나면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산을 내려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여 버렸다.  
전역 후 3년 만인 71년도 봄에 다시 일엽 스님을 찾아갔지만 그동안 노환이 깊어인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말이  하도 어눌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해 신문지상으로 일엽 스님께서 타하셨다는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한 시대의 여성 선각자요, 문필가요, 행동가였던 여걸이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수덕사와 일엽 스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하여 맺어졌다.
지금 수덕사는 옛날과 비교하면 너무 많이 변해 버려서 정감이 들 간다. 그렇지만 근처를 오가는 길이면 옛정을 생각하며  빠뜨리지 않고  다시 찾아간다.

   

       202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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