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by 김 경덕

6월 항쟁


어제(6/10일) 민주화 항쟁 기념식에 현직 대통령이 직접 참석을 했다.

축사도 하고 참석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도 하여주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세상이 이렇게도 많이 변했나?"

상상만 하고 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속속 일어나고 있었다.

머릿속은 아직도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급하게 돌아가는

현실들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려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이제는 당당히 들어내 놓고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30년 전 민주 항쟁의 추억들을

한두 가지 더듬어 본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 그날 그 자리에 우리 부부는 당당히 함께 서 있었다.

때론 다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기까지도 했다.

그 해 봄 3월인가 4월 어느 날 박 종철 군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진실이

아직도 공개되기 전 한 신부를 통해 어느 신문사가 공개를 해 버렸다.

다음날부터 세상은 한순간 발칵 뒤집어졌다.

대학가는 연일 학생들의 데모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당시 86년 아세안 게임을 무사히 끝낸 후 88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매우

분주한 시기였다.

올림픽과 관련된 제법 비중 있는 직무를 맡고 있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학생 시절 데모 다 뭐다 하여 이미 체질이 어느 정도 반골로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민주화 투쟁들을 안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려니 온몸이 근질근질하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연세대생 이 한열 군이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밤새 안타까워하던 아내가 한열 군의 장례식 날 자기도 참석해야겠다고

하면서 체비를 갖추고 아침 출근길에 따라나섰다.

신촌까지 가서 장례식에 참가한 후 운구 행렬을 따라 시청 앞 광장 노제까지 함께 걸어서

동참하였다고 하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내는 몸은 비록 피곤하지만 이제야 겨우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보, 정말 잘했어."

당시 주변 사정으로 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내 놓고 떠들지도 못할 형편이었기에

우리 부부끼리만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았다.

며칠 후 사회 일부 단체와 학생들이 명동 성당을 점령하고 집단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명동 성당은 당시 민주화 항쟁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무장 세력(경찰)과 민주 투사들은 연일 힘겨운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방패라고는 이곳이 신성한 종교 시설이라는 점과 출입구를 막고 있는 신부와 수녀들뿐이었다.

경찰은 시위자들을 폭도들이라고 단정하고서는 강제진압 D-day를 연일 Count down 하면서

자진 해산을 유도하고 있었다.

많은 시위자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핵심 요원들만 남아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때였다.

성당 주변은 철저히 봉쇄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없어 굶고 있다는 소식이 지인을 통해 우리 귀에

들어왔다.

음식을 차입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압구정 성당 주임 신부를 만나보라고 자세한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용기를 내어 집사람과 바로 상의를 하였고 또 집사람은 혼자 하기에는 부담스럽다고 동참할

다른 한 쌍의 부부까지 섭외를 하여놓았다.

아내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부인과 함께 50명 분의 김밥을 한나절 내내 준비하였다.

그날 밤 준비한 음식과 음료수를 싣고서는 압구정 성당으로 미리 약속한 신부님을 찾아갔다.

솔직히 당시는 압구정동에서 신부님께 전달만 하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사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신부님은 내 차의 앞 좌석에 앉으시며

바로 명동 성당으로 가자고 하셨다.

자정이 거의 가까운 시각 우리 일행은 명동 성당 후문(삼일로 방면)에 도착을 하였다.

대문은 에워싸고 있던 경찰들이 전등으로 차 속을 이리저리 비추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들아 !"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점잖던 신부님의 입에서 거친 쌍욕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기다리던 다른 차가 앞서면서

안내를 해 주었다.

사제관 옆 작은 회의실 비슷한 곳이 마지막 남은 시위자들의 휴식 공간으로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준비해 간 음식과 음료를 전달하니 투쟁을 리드하던 사람이 감사의 답례로 지독히 찌들고

땀 내나는 몸으로 나를 "동지"라고 부르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투쟁 현장 곳곳을 안내하며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자세하게 설명까지 하여 주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신부님이 다시 나오셔서 바깥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서둘러 빠져 나가자고 하셨다.

이날 새벽에 강제 진압을 시도할 것이라는 소문이 외부에서도 강하게 돌고 있던 날이었다.

들어온 길로 다시 내려오는데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무장 경찰 대원들이 우리 차를 완전히 둘려쌓다.

동승하신 신부님께서는 차 문을 모두 잠그고 어떤 경우에도 문을 열지 말라고 하셨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자기들의 대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나오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악질 불순분자인 우리 부부를 어떻게 해서던 현장에서 체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차 속에서 위기를 느낀 신부님은 명동 본당 신부님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대 여섯 명의 신부들이 급하게 내려오셔서 우리 차를 둘러싸고 경찰들을 차창 밖에서

막아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뇌리 속으로 지나가는 후회, 그리고 펼쳐지는 파노라마,

집에서 철없이 기다리고 있을 당시 열 살 전후의 아들과 딸의 얼굴들,,,,

차라리 집 사람은 집에 두고 혼자만 올걸,,,,,,,

경찰서 유치방에는 여러 번 들락거린 경험이 있는지라 나는 괜찮지만 겁 많은 아내가 어떻게

견딜까 하는 엉뚱한 걱정이 머리를 혼란시켰다.

완강하게 핸들을 쥐고 버틴지 30여 분, 사복을 입은 경찰 책임자와 신부님의 협상,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향후 일반인 출입에 관한 합의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새벽녘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조금은 무모한 시도였지만 정말 길고도 힘들었던 6월 어느 날 밤이었다.

겁 많은 아내와 겁 없는 남편이 만들어낸, 서툴렀지만 민주화 투쟁에

우리 부부가 직접 동참하게 된 사연이다.


2017년 6월 22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