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기행(2)

by 김 경덕

소나무 기행(2)


두 번째 소나무 기행이다.

이번 코스는 삼척을 기점으로 경북 울진과 영주 그리고 올라오면서 영월을 찍었다. 이번에 보아야 할 소나무가 있는 곳이 오지 산속이라 솔 찮은 산행도 감수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오전 9시에 용인을 출발하였는데 강릉을 거쳐 동해시로 들어가니 벌써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내에 잠깐 들어가 깔끔하게 말아 올린 막국수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우고 태백으로 올라가는 38번

국도로 다시 들어섰다. 환선굴 조금 못 미쳐서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로 들어서니 영경묘, 준경묘 안내 간판이 잇달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준경묘

준경묘는 이조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인 목조의 아버지 이양우의 묘다. 태조의 6대 선조라면 어림잡아 이조 건국으로부터 25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 하였기에 이런 명당자리에

6대 조부의 묘가 온전히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까?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태조 이성계의 개국을 풍수지리설로 덧칠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목조는 고려말 전주지방의 관리였다. 상관의 애첩을 범한 후 그 후한이 두려워 이곳 오지로 식솔을 다리고 피신한 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삼척 두타산 남녘 자락의 오지 중 오지인 이곳에 터를 잡아 묘를 섰다.

마침 이곳이 지운이 서린 명당터라 후에 조선을 개국한 후손들에 의해 성역화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용비어천가의 시작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가파른 산길을 돌고 돌아 한 시간 남직 올라가니 준경묘 입구가 나왔다. 갑자기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입구로 들어서니 몸에 느껴지는 명당의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치부만 가리고 사방에 종아리를 쭉쭉 들어낸 미인송들이 음기보다는 오히려 서기를 느끼게 한다.

잘 정비해 놓은 홍살문과 전실 비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족히 해발 7,800m는 되어 보이는 고지대이다. 아마추어가 보아도 묘의 전체 지형은 영락없는 포란지형이다. 축구장 만한 크기로 묘의 전면이 편하게 펼쳐져 있고 뒤편의 낮은 언덕을 베개 삼아 묘가 편하게 누워 있다.

祖山이 있으면 脈이 있고 맥 아래 穴이 있다고 했던가?

분명히 左 靑龍, 右 白虎에 前 朱雀, 後 玄舞의 지세에 자리 잡은 名穴이다.

아, 선조들이 묘터를 잘 잡았기 때문에 그 후순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을 하였나 보다.

그런데 일반적인 양가의 묘는 부부가 나란히 있기 마련인데 부인의 묘는 여기에 없었다.

여기로부터 한 마장 정도 떨어진 곳에 따로 있다고 한다. 그 부인의 묘가 바로 영경묘이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거기는 과연 또 어떤 자리에 묘터를 잡아 놓았을까? 궁금해진다.


소나무를 보려고 힘들게 올라갔다가

아름들이 미인송(황장송)은 건성으로 보고 묏자리만 열심히 구경하고 내려왔다



영경묘

여기에 있는 미인송도 대단하단다.

그렇지만 머릿속은 미인송보다는 부인의 묏자리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다.

준경묘를 힘들게 내려와 차편으로 3km 정도 이동하니 하사전리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묘의 전실이 마을 큰 길가에서도 올려다 보였다.

여기가 목조의 어머니 평창 이 씨의 묘인 영경묘이다. 다리를 건너 금방 나타나는 가파른 계단을 딛고 전실까지 올라왔는데도 묘가 보이지 않았다. 전실에서 다시 가파른 절벽 위에 난 소롯길을 따라 100m 정도 더 들어가니 다소 실망스러운 묘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사 끝에 매달린 형국의 묘이다.

묘 바로 앞은 절벽이다.

어떻게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묘터를 잡았을까?

묘 아래 좁은 계곡으로부터 생긴 음습한 음기가 그대로 절벽을 타고 올라온다. 음기가 강한 골바람이 되어 올라왔다.

음기가 강해도 이성계 같은 출중한 후손이 태어나나?

아니면 위화도 회군 같은 배신에 이 음기가 작동을 하였나? 어떻게 여기가 명당터가 되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재실과 비각이 묘 앞에 세울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세워 놓았나 보다.

짧은 풍수 지식으로는 도저히 명당 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는 이조 말 고종에 의해 뒤늦게 왕릉에 준하는 칭호를 받았다. 조선의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자 짚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옛 조상묘를 정화하여 천기를 받으려 하였던 모양이다.

만약 이조 말 국운이 왕성하였다면 이 자리는 영영 잊혀진 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쪽이 망하면 또 다른 한쪽은 흥하고, 흥하고 망하는 역사의 진실을 여기에서도 배울 수 있었다.


"해동 육룡이 나시어 일마다 천복이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고등학교 배운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해동 육룡의 첫째가 이 영경묘 주인의 아들인 목조다.


죽은 자의 음택보다는 양택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삶이 더 소중한 일인데......

아직도 위정자들은 이것을 정확히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발길을 돌린다.


2022, 12, 4

22, 10,12일 기행을 뒤늦게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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