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경덕 Aug 25. 2023

울릉도 회상

      울릉도 1

60년대, 당시에는  많은 제주도 해녀들이 여름이 되면

여기까지  건너와 성게잡이를 하였다.  

 철 잠깐 머물다가 작업이 끝나면 돌아가는 해녀들은 이곳 바닷가 마을에 빈방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기거하지 못했다. 바닷가 가파른 비탈에 초라한 움막을 치고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다.

울릉도의 인심이 이렇게 야박하냐?

해녀들의 임시 거처인 움막은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 궁금해하던 차 어느 날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할머니 왈!

"아, 저년들이 이 마을 남정네들을 모두 거시기 동서로 만들어 놓았제."

"그래서 마을에 다시는 못 들어오게끔 쫓아 내 버렸지, 이제는 마을에 얼씬도 못해"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일가?

외간여자 구경하기 힘든 이곳 섬마을 남자들의 잘못된 발정기 때문 일가?  

아니면 물길 질 하려 들어와 남정네 품이 그리웠던 해녀들의 암살기 때문 일가?  억지로 추론해 보니 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준 기막힌 조합이었다.

이런 웃어넘길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이 바닷가  오지 마을감추어져 있었다.

낮에 쟁기질 한 남정네는 밤에는 물길 질 하고 싶었을 것이고, 낮에 물길 질 한 여자들도 밤이 되면 새로운 쟁기질이 그리웠을 이다.

이렇게 물길 질과 쟁기 질이 그리운 사람끼리 만난 것도 죄가 되었던가?

30여 호 가량되는 이 마을에서 일어난 치정 사건은

쉬쉬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 덮어버렸단다.

그 대신 약자인 해녀들만 마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66년 대학에 갖 입학한 Freshman 시절, 이 어촌 마을에 하계봉사 활동에 참가한 대원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쪽이든  원하는 데로

무시로  찾아가서 만날 수가 있었다.

거의 매일 약간의 생필품과 구급약을 가지고  

해녀들의 움막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간지러운 거래였지만, 우리가

가지고 간 보잘것없는 생필품 몇 점과 그들이 잡은

자연산  전복을  물물 교환하였다.

당시 이 마을은 오로지 소형 어선으로만 도동에서

2시간 이상 달려와야 도달할 수 있는 외딴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복은 직접 먹을 것 외에는 잡지 않았다.

지금처럼 산채로  생 전북을 대처로 운송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들도 물속에 들어가면 작기는

하였지만 쉽게 몇 마리는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대신 성게는 돈벌이가 되었다. 잡자마자 알을 까서 염장을 해 우니를 만들었다. 일본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큰돈이 된다고 하였다.

매일 성게 작업이 끝난 후 우리들에게 건네주기 위해

실한 놈들만 열 마리 이상을 거의 매일 잡아다 주었다.

크고 싱싱한 자연산 전복을 한 주일 내내 포식하였다.  지금도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자연산 전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섬을 떠나는 날에는, 물론 대가는 지불하였다, 햇볕에 말린 전복을 한 보따리 따로 챙겨 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선물을 하였다.


연 전에 다시 이곳을 찾아가 봤지만

산도 옛 산이고 물도 옛 물이었지만

집과 절은 특히 인심은 옛 울릉도가 아니었다

특히 바다 물속은 지난날의 울릉도가  더더욱 아니었다.


오늘같이 무더운 날은  다시 울릉도로,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2020,8,25


작가의 이전글 여름이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