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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경덕 Sep 21. 2023

위도(蝟島)

위도(蝟島)

잰걸음에 달려 전북 부안에 있는 내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아직도 아침 9시다.

연꽃 다음으로 불자들이 사랑하는 상사화를 친견하려 서둘러 내려왔다. 애초에 영광 불갑사를 목표로 하였으나 거기는 지금 상사화 축제기간이라 인산인해란다.  다음은 고창 선운사지만 이태전에 다녀왔다. 내려오는 길에 안개인지 해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낮고 연한 구름띠가 시야를 가렸다 열렸다를 반복했다. 해가 솟아오르니 한바탕 춤사위를 벌린 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내소사는 뭐니 뭐니 해도 입구에 있는 전나무 숲길이 명품이다. 안개가 걷힌 직후라 아침 길이 너무 호젓하다. 늦더위에 풀이 죽어있던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다리에 힘이 오르는지 나보다 종종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간다.

"여보, 천천히 가,

 당신 걸음이  세월보다 더 빨라!"

오래전 이곳에 왔을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상사화는 한물가고 오늘은 앙상한 꽃대만 남아있다. 그래도 아직도 남은 몇 송이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리를 반겨준다.

사천왕문을 넘어서며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북방수호신 다문천왕에게 한마디 소원을 남겼다.

"내년에는 저 전나무 밑에

 상사화로 불을 피워 주십시오"


수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사찰 입구 길목에서 한 모녀가 모시떡을 팔고 있었다. 60대 초반과 20대로 영락없는 어느 댁 사모님과 고명딸 모습이었다. 차림새나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보아서는 장사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 같았다. 과일상자 위에 얌전하게 포장하여 올려놓은 모시떡도 불과 10팩  정도에 불과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다가가서

"이거 얼마예요?

5천 원입니다.

집에서 직접 만들었습니까?

예,

여기서 장사하시는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몇 개를 가방에 넣은 후 계속 파고들었다. 사실은 대도시에 살다 귀농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딸이 다니려 내려왔단다. 겸사 이 떡을 만들어 이웃에 돌렸는데 다들 너무 맛있다고 하며 장사를 해도 되겠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여기에 가지고 나와서 시험판매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내가 첫 고객이었다.

떡도 이쁘게 빗었고

포장도 이쁘게 했다.

맛 또한 일품이었다.

그때 그 모녀가 지금도 모시떡 판을 돌리는지 접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덩달아 만나게 된다.

내소사를 나서며 마침 모시떡을 파는 집이 있어 한팩을 사서 입에 넣어보니 여기의 모시떡 맛은 예전 그대로다.


이곳과 가까운 섬 위도에도 상사화 축제가 있다는 정보를 얼마 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내소사 상사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만회할 요량으로 격포항에 가서 위도행 페리를 타기로 했다.

마침 11시에 입도하는 배가 있어 서둘러 타고나니 숨이 찬다. 출도는 오후 2시 10분에 하기로 했다. 이 항로는 1993년 여객선 침몰 사고로 300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오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한 시간 만에 위도에 도착하여 상륙을 했다.

이 섬의 모양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생겼다고  고슴도치 '위'자 가져와 위도라고 작명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 역시 상사화는 이미 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다. 분명히 제철인데 금년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상사화 개화시기마저 무참하게 뭉게 버렸다.


이 섬은 20여 년 전 원자력 발전소 저 준위 핵 폐기물 처리장으로 일차 지정된 적이 있다.

섬 주민보다는 부안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로 이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만약 그 당시 이 섬이 핵 폐기물 처리장으로 지정이 되었다면 오늘날  이 섬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많이들 아쉬워하고 있었다.


한 때 위도는 연평도, 흑산도와 더불어 서해안 조기잡이의 3대 파시가 형성된 곳이다. 지금은 마치

이 빠지고 허리가 굽은 70대 노인 같이 허접한 모습이다. 면 단위라 초등학교가 2곳 중학교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하나는 폐교되었고 그나마 남은 초등학교의 전교생은 17명, 중학교는 11명뿐이란다.

농촌이, 어촌이, 작은 도서(섬)의 존립 자체가 이제는 위태롭다. 지척의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지난날에는 열 가구 이상 살았다는데 지금은 단 한 가구 그것도 남자 혼자서만 살고 있단다. 이것이 어촌의 오늘날 실상이다.

군에서 운영하는 순환버스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토박이 운전기사 양반이 외지 방문객을 위해 지나가는 곳마다 구수한 사투리로 관광 안내를 해 주었다.

운전기사의 마지막 멘트가 귀에 남는다.

건너 보이는 저 낡은 집들이 60년대 파시가 형성될 때 번창했던 색주가입니다. 파시 때는  색시만 해도 2,3 백영이 되었지요.

각지에서 몰려온 어부들이 낮에는 조기배를 타고, 밤에는 여기 와서  색주가 배를 타고...

그렇게 위도는 밤낮으로 배가 출렁되던 곳이라고 한다. 지난날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섬이 무엇으로 다시 파시를 이룰 수 있을까?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될 텐데........

        2023, 9, 19

             위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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