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 경덕 Mar 30. 2024

다시 제주

1, 파도야!


"파도야 어쩌란 말인가?

 파도야 어쩌란 말인가?

 님은 뭍같이 꼼짝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인가?

 나는 어쩌란 말인가?"

     유치환의 '그리움'


길 떠나는 시어머니의 마지막 심술인가?

새벽부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을 모른다. 지금 내리는 비는 부드럽고 여린 보통의 봄비와는 거리가 멀다. 정오를 넘어서니 여기에 돌풍까지 가세한다.

누가 이 봄의 성깔을 건드렸나?

물 건너온 객을 향한 제주의 심보가 점점 도를 더해간다. 자연현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폐배자의

소리를 듣기 싫어 자리를 박차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우선 허기부터 채워야겠다.

이런 궂은날은 뭐니 뭐니 해도 칼국수가 제격이다. 쇳소각 인근에 있다는 보말 국숫집을 빗속에 더듬어 찾아갔다.  이곳 제주 토박이들이 즐겨 찾는 작은 포구의 평범한 식당이다. 그러나 맛만은 비범하다.

보말의 짙은 향기가 커다란 칼국수 대접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콧등 치기를 하면서도 고개는 연신 바다로 향한다. 파도가 금방이라도 우리를 덮칠 것 같이 밀려온다. 여기에 사는 지인부부는 창가에  바다를 등지고 앉고 우리 부부는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

이 방식이 제주도를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란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파도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익숙해진다. 거친 파도 소리가 헤비메탈 밴드 소리처럼 들린다. 칼국수 그릇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보말을 싹쓸이한 후 미련을 떨고 일어섰다.

서편하늘에 파란 구멍이 뚫리며 서서히 비가 잦아진다. 날이 개나 보다.

봄 나들이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꽃구경이다.

혹시나가 적중했다. 올린 그림은 제주 대한항공 제주 정석비행장 앞길인 가시리길이다. 길가의 유채꽃과

벚꽃이 한창이다. 만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실없는 맹세를 하고 싶은 그러한 꽃길이다.



 2, Camellia (동백꽃)

서둘러 돈내코 인근에 새로 조성한 생태 숲길로 차를 몰았다. 선진국이 따로 없다. 40년 전 미국 출장길에 스모키 마운테인 국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 산책로에 설치된  나무데크를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격세지감이다.

오늘 생태공원 산책로에 깔려 놓은 야자수 메트와 나무데크 산책로는 완벽했다. 그리고  탕방객용 화장실은 5성급 호텔보다 더깔끔하다. 화장실에 들러 작은 볼일을 보고 나오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조각을 가만히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선진국 소시민이 마땅히 해야 할 소임일 것 같아서였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별생각 없이 애들이랑

가족여행 날짜를 조정하다 보니 바로 고난 주간이다.

더욱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 금요일이다. 오늘 새벽 고난 주간 새벽 특별기도회를 유튜브로 참여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출발지점에 마련된 이정표 앞에서 공원 안내자의 친절한 코스 안내 설명을 들었다.

잘 조성해 놓은 여러 갈래 산책로 중 가장 긴 코스를 택한 후 트레킹로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때 늦은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오래전에 읽은 글 중 동백꽃에 대한 한 구절이 생각났다.

 "동백꽃은

  나무 위에서 한번 피고

  땅에 떨어져 다시 피고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또 핀다"

너무 억지스러워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글이었지만 한번 읊고 나니 아내가 금방 화답을 했다.

"동백은 나무 위에 피어있을 때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떨어져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모두 다 하늘을 바라본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놓은 아내의 무게 있는 즉흥 화답이 내 귓속 깊이 들어왔다. 고난 주간 성 금요일의 깨달음이다. 갑자기 땅에 떨어져 상처받은 동백꽃이 핏빛으로 보였다. 창에 허리를 찔러 고통받고 있는 십자가상의 예수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나무 위에 남아있는 몇 송이 꽃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떨어질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십자가에 달릴 때

  오, 오, 오, 나는 그 일로 인해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저도 저 땅 위에 동백꽃처럼

땅 위에 떨어진 처지입니다.

얼마후면 시들어져 흙으로

돌아갑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땅 위에서의 시간,

저 동백꽃처럼 하늘을 향해 항상

귀 기울이며 당신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2024, 3, 30

        제주 서귀포 Parnas Hotel


작가의 이전글 봄날은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