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한 해의 마지막 정점을 찍어주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주말이면 손녀들이 찾아와 성탄 전야제 엉터리 축하 공연 준비로 소란하다.
조명이 어쩌고 MC가 어떻고 티켓은 얼마에 팔고 우리가 소싯적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들이 쉴 새 없이 애들의 입속에서 오르내린다.
격세지감이다.
춥고 배고팠던 50년대, 시골 교회의 성탄절 행사는 지역의 큰 이벤트였다.
우리들은 한 달 전부터 저녁마다 교회에 모여 축하 공연 준비를 했다.
노래, 무용, 성극, 성경 낭송 등을 다양하게 연습을 한 후 재량에 따라 열흘 전쯤에 각자
맞을 역할이 정해진다.
문화시설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농촌에서는 연극이나 무용 등은 관람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날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마을 어른들이나 심지어 인근 마을 어른들도
교회에 나와서 우리들이 준비한 공연을 관람하여 주었다.
12월이 들어서면 흥분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성탄 전야에는 최고조에 달한다.
성탄 일주일 전쯤에는 교회 청년들이 연장을 들고 산으로 올라간다.
크리스마스트리용 소나무를 채취하기 위해서이다.
어린 우리들도 따라나선다. 각자 조그만 성탄 추리용 나무를 구해오기 위해서이다.
2m 남짓 크기의 모양 좋은 소나무 두 그루가 본의 아니게 크리스마스 희생양이 된다.
당시 교회는 남녀 출입문이 따로 있었다.
실외 크리스마스 추리도 남녀 출입문 앞에 따로따로 설치하였기 때문에 두 그루가
필요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추리에 올려놓은 장식용 소품들이 가관이었다.
눈은 집에서 쓰다 남은 목화솜으로 대신했고 별은 손수 담배 은박지로 만들었으며
징글벨 용 종은 나무로 비슷하게 깎아서 매달아 놓았다.
대부분 두꺼운 종이로 만들었으며 가장 화려한 장식용 소풍은 구호품 속에 든
미국산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기쁘다 구제품 나왔네
똑같이 갈라라
목사는 목도리
장로는 장갑
집사는 짚신
똑같이 갈라라 똑같이 갈라라
또-옥 같-이 같이 갈-라 -라."
당시 개구쟁이 우리들이 불렀던 찬송가를 개사한 성탄 노래이다.
아마도 교회 다녔던 사람들도 공짜 앞에서는 양심이 온전치 못 했던 것 같다.
성탄 전날 밤에는 외지나 대처에 나갔던 사람들도 서둘러 모 교회로 돌아온다.
어린이들의 총리허설이 끝나고 나면 젊은이들은 교회나 이웃집 큰 방에서
세칭 올나이트를 한다.
새벽 4시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우리 집에서 준비한 국밥 한 그릇으로 밤새 허기진
배를 채운다. 그런 다음 2-3개 조로 나누어 새벽 찬양을 나간다.
멀리로는 4-5km 다녀오기도 한다.
한 겨울 새벽 공기가 차기도 했지만 추위와는 상관없는 인상 깊은 연래 행사였다.
성탄절 아침이면 각자의 집에서 전 날 준비한 음식을 어머니들이 다들 머리에 이고
교회로 온다. 성탄 축하 예배가 끝나고 나면 바로 이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푸짐한 동네 먹거리 잔치가 시작된다.
어릴 적 내가 다닌 시골 모 교회는 이 음식을 나누는 시간에 주일학교 시상식을 함께
거행하였다.
어느 해였던가?
주일학교 예배 시간 개구쟁이 어린이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예배 시간에 떠들거나
기도 시간에 눈을 뜨는 학생들의 이름을 교사들이 적어 누적시키기로 했다.
3번 적힐 때마다 년 말 시상식에서 상품을 하나씩 빼기로 한 제도였다.
시상식장에서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김 **"
" 출석 1등, 요절 암송 1등, 헌금 1등, 인도 1등"
예상한 대로 네 가지 항목 모두가 일등이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벌점 9점"
무려 2개월 만에 9번이나 내 이름이 적힌 것이었다. 매주 한 번 씩 적힌 꼴이다.
참석하신 어른 들은 모두 웃으셨고 상대적으로 상을 받으러 나간 내 자존심은
형편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나를 친 아들처럼 귀여워하셨던 박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하나, 둘, 셋
세어가시며 내 상품을 차례로 빼어 놓고선 나에게 시상을 하셨다.
목사님이 건네주시는 시상 품을 건네받자마자 나는 불경스럽게도 받은 상품 전체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내 팽개쳐 버렸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그날 저녁 한 달 내 내 준비한 축하 공연에 제대로 출연하지도 못하였다.
"나쁜 녀석"
지금 나 스스로 하는 자조적인 말이다.
다음 날 목사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전 날 공제해 놓은 상품을 모두 내게 돌려주셨다.
상처뿐인 그날의 영광,
이 모두가 성탄절만 돌아오면 쓴웃음이 나오지만 생생하게 남아있는 소싯적 추억이다.
"Everybody, Merry Christmas!"
2015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