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至
오늘날 동지는 물 건너온 밸런타인데이보다 더 초라하다.
그래도 이번 동짓날에는 아내가 잊지 않고 팥죽을 쑤어 주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소싯적 우리들의 동짓날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소중한 작은 명절이었다.
팥죽을 쑤기 전 팥 속에 들어있는 모래나 불순물을 골라내는 일도 우리 몫이고
옹심이 즉 새알을 만들 때는 우리들도 당당히 참여하여 한몫을 담당하였다.
자기 나이 수만큼 만들고 먹어야만 다가오는 새해를 무탈하게 맞이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웃집 수* 할머니는 악귀가 못 들어오게 한다고 곱게 쑨 팥죽을 빗자루에 적셔
문설주에 뿌리는 의식을 동짓날 저녁마다 괴성을 지르시며 매년 치르셨다..
동지는 건강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 하는 일 종의 해거리
통과 의례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아울러 농사일도 동지 전에 모두 마무리를 지어야만 한다.
농기구는 깨끗이 정비한 다은 창고에 들어가고 추수한 각종 곡물들도 모두
겨울 채비를 하려 제자리를 찾아간다.
햇 빛에 잘 말린 벼는 마당 한가운데에 볏짚을 엮어 만든 임시 뒤주에 들어가고
콩 종류는 독 안이나 병 속에, 고구마 등 구근 종류는 땅속으로 들어간다.
한 겨울에 먹을 무는 두자 정도 깊이로 땅을 파고 나란히 누인 다음 짚을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놓고 앞뒤로 구멍을 내어 통풍을 시켜준다.
음력 설날 전까지는 싱싱한 무를 매일 먹을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한 천연 냉장고였다.
기나긴 겨울밤 출출할 때는 이 무를 끄집어내어 간식 대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깎아 먹곤 했다.
먹은 다음 올라오는 역한 트럼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이 모든 일들이 동지 전에 서둘러 끝을 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나면 춘분 전후에 찾아온 머슴들이 각자의 세경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간다.
팥 죽 한 그릇을 든든히 챙겨 먹고 고향으로 나서는 길은 결코 빈손이 아니다.
세경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벼 몇 섬으로 정한 후 일을 했지만 직접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대신 한 해 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인집에서 마련해주는 찰떡을 한 보따리씩 들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전 날 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떡메를 치던 머슴들의 환한 얼굴 모습들이
지금도 선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일꾼들은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한 겨울을 편하게 쉴 수 있어서 좋겠지만
남은 우리들은 이 날부터 고생문이 훤하게 열린다.
겨우내 마당을 쓸어야 하고, 쇠죽을 끓이고, 마구간 청소도 해야 하는 잡다한 집안일들은
모두 우리들 몫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농촌은 어느 곳이나 특용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농한기가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농한기는 바로 동지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투전꾼들은 물 좋은 투전판을 기욱 거리기 시작하고 엽색가들은 가까운 대처의
기방을 기욱 거리기 시작한다.
고향 마을은 50여 호가 채 되지 않는 평야 지대의 집단 농촌 마을이다.
기독교인과 믿지 않는 가구가 반반 정도 균형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에는 술을 파는 구멍가게마저 없을 정도로 조용한 모범 마을이었다.
그런데도 동짓날부터는 마을의 안방마님들에게 비상이 떨어진다.
농번기에는 바쁜 농사일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동지부터 다음 해 춘분까지 약 3개월간 온갖 사고가 일어난다.
소 판돈을 투전판에서 다 날렸다는 누구누구 아빠,
기생집에 논문서를 갖다 주었다는 누구누구,,,,,
누구 아들은 손버릇이 좋지 않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둥
또 누구 아들은 술만 마시면 술주정으로 미쳐버린다는 둥
우리 동네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마을 불문율이 있었다.
금*이 형은 남의 집 물건을 훔치다가 들통이 나 다음날로
마을을 떠나야만 했고, 윤* 누나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는 바람에
소문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 지금까지도 만나보지를 못 했다.
십 년 전부터 나는 인생의 동지를 시작했다.
오늘은 교회에서 맡은 장로 직분마저도 내려놓았다.
아파트라 아침마다 빗자루 잡을 일도 없고 쇠죽을 끓일 일도 없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인생의 춘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돌아갈 영원한 고향은 오직 한 곳뿐인데
빈손 들고는 갈 수가 없잖아요!
2015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