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함께 걸어온 친구
“德아, 돈 있나?”
“없는데,,,,,,”
친구는 우여곡절 끝에 나보다 한 달 먼저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나도 따라서 입대 후 한 달여 만에 P.X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 본 친구의 우아한(?) 얼굴은 아마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하반기 가장 힘든 야전 훈련을 막 끝낸 직후라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던 때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허기가 극에 달한 식욕이었다.
서로가 사람이 아닌 굶주린 짐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정면으로 마주쳤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돈 몇 푼과 빵 한 조각을 나누어 가졌던 지난날의 가슴 찡한
추억의 순간들,
이처럼 우리는 때론 양지에서 때론 음지에서 나누어 먹은 빵 한 조각처럼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챙기면서 70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니까 친구지”가 아니라
친형제와 다름없이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아마도 여생도
변함없이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얼마 전 상영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세대이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접기도 하고 때론 이를 악물고 따라가다 포기하기도 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과 같이 어려운 세대에 태어난 친구는 자신의 꿈을 많이 포기하며 살아온
또 다른 한 사람의 주인공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친구는 창녕 曺 씨 曺植 선생의 후손이요 가문의 長子었다.
당시 고향 땅 남녘에서는 창녕 조 씨, 송, 노 씨 등을 명문가 성씨 서열 상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소싯적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바로 귀가하지 않고 친구 집에 들러 한참을 놀다가
가곤 했다.
2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남향으로 반듯이 자리 잡은 친구 집은 탱자와 사철나무가
담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대문이 없는 집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사랑채, 당시 선친께서 이곳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계셨고 왼편에는 텃밭, 물 좋은 우물이 끝에 있고 마당보다 두어 자 높은 본체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집 뒤는 시원한 대나무가 본체를 감싸 안고 있었다.
본체 건넌방에 기거하시던 할아버지는 우리가 마당에서 떠들며 놀고 있을라 치면
문을 확 열어젖히고서는
“ 이 상놈의 자식들 “ 하시면서 심심찮게
야단을 치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는 창녕 조 씨가 대단한 양반 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교단에 계시면서도 고시공부를 계속하셨던 선친의 모습을 보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편으로 친구 모친은 글재주 뛰어나셔서 인근 마을의 큰 祭文들을 직접 써주는 글 꾼으로
소문이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의 修學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이러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나는 친구가 학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한동안 생각을 했었다.
몇 해전 자기 집안에 박사만 해도 일곱인가? 여덟인가? 하며
은근히 나에게 자랑을 했다.
너는? 뭐 했는데? 하면서 반사적으로 내가 되물은 적이 있다.
형제들과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길 중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온 친구가 바로 조 사장이다.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을 곁에서 조 사장을 지켜보면서 때론 서운한 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친구가 감내해낸 長子의 모습은 항상 나의 귀감이 되었고 그럴 때마다 서운한 감정을 잊어버리게 하는 청량제가 되어 주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마 초등학교 5학년, 생모를 천국으로 떠나보낸 친구는 누구보다도
외로웠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을 속 깊숙이
감추고 항상 어린 동생들 챙기기에만 노심초사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막내 ‘혜숙’이 얘기는 감추고 싶었지만 오늘은 집고 넘어가야겠다.
고생 끝에 자리 잡은 친구의 첫 직장은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이다.
첫 출근 후 얼마 있다가 우리 둘만의 축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우리 같은 개병대(?) 술버릇은 안주가 나오기 전에 후딱 한 병을 비워버린다..
여느 날과 달리 더 급하게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적당히 오를 즘
“德아, 오늘 나랑 같이 가자”
“왜? 무슨 일이 있나?”
“보여 줄 게 있다”
늦은 밤 둘은 기분이 거나해져 안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골목을 돌아 돌아 들어가 어느 쪽문을 두드리니 생각지도 않게 숙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몇 차례 술잔이 다시 오고 가자 조 사장은 그동안 쌓아 두었던 피맺힌 서러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친구는 고등학교 진학 기회를 놓치고 있던 막내 숙이에 대해 내내 가슴 아파해하고 있었다.
이 년(?)이나 늦게 서울로 데리고 왔는데 그래도 숙이가 명문 풍문여고에 들어갔다고,
이렇게 한살림 겨우 차려 안정을 되찾았다고, 나에게 자랑하려고 그날 저녁 나를 안양으로
데리고 내려간 것이었다.
먼저 정해진 울산의 좋은 직장도 포기하고 숙이와 같이 지내기 위해 서울과 수원 중간
안양에 집을 택한 것이었다.
그동안 쌓인 서러움을 주고받다가 그날 저녁 우리들의 마지막 술판이 그만 눈물 판으로
바뀌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혜숙이가 밤새 적어 책상머리에 놓고 간 편지를 같이 읽다가 또 한 번
눈물을 훔치면서 각자의 직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요즈음도 혜숙이의 근황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지난날의 아픈 상념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혜숙아!”
“오빠 다음 생일상은 네가 한 번 차려 드리라, 그리고 나도 초청하고,,,”
우리는 이렇게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웃으면서 또 울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친구의 고향은 정확하게 우리가 함께 소싯적을 보낸 김해 대동이 아니고 상동이다.
평야가 넓은 김해인데도 당시 상동은 숯가마가 많이 있었던 산골 오지였다.
이곳에 친구의 친할머니님이 다시 들어가 사시면서 개척교회를 뒷바라지하고 계셨다.
키도 크시면서 박식하셔서 여느 시골 할머니와 다르게 다방면으로 사회 활동을 하셨던
할머니셨다.
큰 딸 ‘여명’이가 여러모로 친할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제법 큰 시골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셨던 나의 아버님과 가까이 교류하시면서 한 달에
한번 이상 우리 집에 오셔서 개척교회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가셨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의 교분은 대를 이어서 지속된 셈이다.
나는 친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편에 속한다.
왜냐하면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혜자” 누나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며 한 집에서
일 년 여를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큰 눈을 부라리며 뜰 때는 찬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강한 ‘의협심’이 느껴진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부산 교대 앞에서 함께 생활을 할 때 깐죽 되며 덤벼대는 십여 명의
마을 또래들을 이 눈 하나로 당당히 제압할 정도였으니까,
한 편으로 보기보다는 마음 씀씀이가 상당히 자상하다.
가끔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에 나가 보면 조 사장의 인기는 아직도 할머니 동창들
사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최고로 높다.
때론 불같은 正義感과 好 不好의 기준이 너무 분명해서 손해를 많이 보기도 한다.
얼마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도장리에 친구 종현이와 또 다른 서울 살던 친구 영철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德아! 너만은 오래 살아야 된다.”
“너는 예수 잘 믿으니 오래 살 끼다”
하던 말이 요즈음에도 귀에 자주 맴돌며 들려온다.
“그래 너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라”
못다 이룬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들을 훌훌 다 털어 버리고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
저렇게 멋지게 마련해 놓은 장호원 선영을 네가 아니면 누가 자주 찾아가서 정성을
다해 돌보며 가꾸겠나?
“수환아!”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자식 복은 제대로 받은 것 같다.
애들 뒷바라지나 잘해 주면서 손주들 재롱 지켜보면서 여생 행복하게 살자.
2015년 12월 4일
P.S 칠순을 맞아 万供이란 호를 받은 친구에게 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