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by 김 경덕

회고


점잖게 말하면 검 검 절약하시는 분,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구두쇠

마을 사람들이나 주위 친인척들이 평소에 늘어놓은 선친에 대한 인물평이다.

그래서 아버님 별칭은 김해의 김 용기 장로이셨다.

소싯적 즉 중학교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한 터라 한 달에 한 번 또는 격주로

고향 집에 들러서는 필요한 생활비와 용돈을 아버지로 받아 와야만 했다.

그때마다 용처를 하나하나 묻고서는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드시면

항상 20-30%를 삭감하고 주시곤 했었다. 철이 들기 전에 거짓말로 극장 등

유흥비로 얼마를 더 타 내려다 들통이 나 혼이 난 적도 있었지만 ,,,,,


입학철이다.

나는 66년 2월 말에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 입학식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 날 저녁 나를 안방으로 불러 앉히시고는 서울 생활비 용처를 일일이

확인하시기 시작했다.

'하숙집이 학교와 가깝다니 교통비는 필요 없을 터이고'

'책값은 등록금에 포함되어 있다니 또 필요 없고

'공책, 연필 값과 교회 헌금도 조금 있어야 재'

하숙비가 한 달 4000원이라니 매달 4200원 보내마'

' 아껴 써라'

'애, 아버님'


이제야 털어놓을 수 있지만 과거의 잘못한 처신 중 하나,

삭감된 용돈 중 모자라는 부분은 항상 어머니께서 채워주셨다.

아버지 몰래 쌀 됫박을 이웃에게 펴 주시고는 마련한 돈을 몰래 감추어 두셨다가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마다 내 뒷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시곤 하셨다.

이제부터는 일 년에 두 번,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서 방학 때만, 밖에 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야 되니 나의 비상금 줄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방법 중 하나,

당시 합격 통지서와 함께 받아온 등록금 총액은 26,950원이었다.

지금처럼 온라인이 없던 터라 입학식 날 몸에 지니고 상경해야만 했다.

그래서 머리를 굴러 아버지한테 청구한 금액은 29,650원,

슬쩍 6과 9를 바꾸어 3,000원 차이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농사를 지으시며 힘들게 등록금을 마련하셨을 아버님에게 해서는 안될

못된 거짓말을 하였던 것 같아 정말로 후회스럽다.

그런데 서울로 출발하는 날 아침, 절약하시느라고 항상 흰 봉투 대신

누런 봉투를 애용하시던 당신께서 누런 봉투 두 개를 나한테 건네주셨다.

하나는 등록금이 들어있는 29,650원 자기 앞 수표,

다른 하나는 10,000원짜리 수표,

그리고 현금으로 한 달 하숙비 4,200원,

네가 의아해하며 10,000원짜리 수표에 대해 물어보니

아버님 왈 '객지에서 궁한 띠 내지 말고 급할 때 써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시 진심 어린 뉘우침을 참아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감추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참회의 고백 대신 나는 몇 가지를 다짐하였다.

아버지께서 고생하시며 보내주는 학비와 생활비는

' 절대로 허튼 곳에 함부로 써지 말자고'


나는 당구를 치지 못한다.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반 친구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거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당시 대학생들의 캠퍼스 생활 일상사였다.

지금은 커피를 준 마니아 급으로 즐겨 마시지만 직장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커피를 비교적 멀리했었다.

한 달 2000원으로는 당구장이나 다방에 맘 놓고 출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 없다는 핑계를 대기 싫어 당구는 칠 줄 모르고 커피는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멀리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난주에 선친의 기일이 있었다.

생전의 아버님의 모습을 기리면서 이 사실만은 아직까지 자식들한테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 선친에 대해 누가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 뒷 말을 할지라도 내가 분명히 주장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있다.

"우리 아버지는 구두쇠가 아니고 자식들 모두를

객지에 유학 보낸 선각자였다고."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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