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린 할머니는 에메랄드 언덕 위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오래되고 아름다운 집에 사셨다. 스탠퍼드 국제 센터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시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자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수업을 이어가셨다. 할머니는 정이 많고 유머가 넘치셨지만 꼬장꼬장한 성격에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학생들을 당황시켰기 때문에 오래 붙어있는 학생이 많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해가 갈수록 몸이 쇠약해지셔서 더 이상 본인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셨다. 여러 번 응급실에 실려가고 병원 혹은 요양원에 입원하셔서 연락이 두절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떡해서든 할머니를 찾아내어 병문안을 갔다. 할머니께 배운 게 많은데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다는 도덕적 책임감도 있었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사실은 추함에 더 가까운) 생의 말로를 가까이서 미리 봐 두고 싶은 호기심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할머니의 성질은 점점 더 고약해져서 갈 때마다 애를 먹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책을 보면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노인이 죽기 전 아끼던 제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본인의 지혜를 전수해주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할머니와의 만남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머니는 고통에 짓눌려 늘 신음하셨고 내 눈을 바라보며 죽고 싶다 하셨다. 나는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19년이다. 코비드 이후에는 할머니를 찾아뵐 수가 없었다. 친한 언니가 언젠가 한번 전화를 걸어 할머니의 안부를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언니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셨다. 언니를 잊으셨으니 아마 나도 잊으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직 살아계신다고 해도, 돌아가셨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미뤄두고 있다.
할머니는 내가 드린 이 그림을 무척 좋아하셔서 벽난로 위에 걸어두고 집에 오는 손님마다 그림을 자랑하셨다. 그림 속 모습처럼 행복했던 기억 속에 머물러 계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