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앞에서 나는 신에게 분노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
삶의 균열이 생긴다.
그 결과는 공포일 수도, 환희일 수도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젊은 시절의 나는 그것을 모두 신의 뜻이라 여겼다.
그 시절,
나는 내 삶을 성찰하지 않은 채
사후의 세계에만 매달렸다.
고통은 신의 벌이었고,
작은 기쁨마저도 신의 축복이라 믿었다.
나는 끊임없이 용서를 빌고, 감사를 바쳤다.
고등학교 시절,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버스 사고에서
열 명 중 한 명만 다쳤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았을 때도,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같은 사건 앞에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그 차이를 우리는 개성이라 부른다.
백 명이 있다면, 백 가지 개성.
그 개성은 감성의 차이로,
결국은 인상(印象)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인상을 ‘사실’이라 착각한다는 점이다.
감정은 진실이 아니다.
그저, 인상일 뿐이다.
한 사건을 보고 나는 절망한다.
너는 웃는다.
껄껄 웃는 너를 보며 나는 분노한다.
사건이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해석한 나의 인상,
그리고 그 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였다.
기억은 유쾌함과 불쾌함으로 나뉜다.
때로는 유쾌한 아홉 가지 기억도
단 하나의 불쾌함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의 따뜻한 기억이
불쾌함을 다 지워버리기도 한다.
의식은 의지를 끌고 다닌다.
좋은 기억은 오래 남고,
나쁜 기억은 흐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죽음 앞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죽음은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서울성모병원 응급실.
입안 가득 쓴맛이 맴돌고,
나는 침묵 속에서 떨고 있었다.
‘내가 죽어야만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는가?’
나는 되묻는다.
기도하던 청춘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신에게 화가 나 있다.
내가 죄가 있다면,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다.
그 죄로 인해 죽음이 온다면,
신은 잘못되었다.
나는 분노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 니체, 칸트도
이러한 질문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신이 나를 비웃는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철학이라는 문 앞에 선다.
분노를 안고, 생각으로 들어선다.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