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酒道)에 의문이 든 순간

by 노경문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마셔도 여섯 잔쯤 홀짝거리는 서른아홉 살 남성이 한 커뮤니티에 글을 남겼다.

그는 말했다.
술자리는 싫지 않다. 분위기를 좋아했고, 윗사람과도 무난히 어울렸다. 마음 한켠에는 늘 같은 의문이 남았다.

“왜 얼굴을 돌리고 마셔야 하나요?”
“왜 잔을 아래로 대야 하죠?”
“술잔이 비면 왜 누가 채워야 하나요?”

그는 반항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주도 예절'이라 불리는 문화가 어디서 비롯되었고,
왜 여전히 작동하는지.
그리고 지키지 않을 때,
왜 누군가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지.

그의 질문은 내 마음에도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켰다.

첫 번째 댓글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님 말이 다 맞습니다. 예절은 단지 문화일 뿐입니다."

짧은 답변 속에는 관계 속 힘의 균형을 고정하려는 익숙한 관성이 숨어 있었다.

상사와는 예절을 지키되, 동년배나 후배와는 스스로 문화를 깨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조언했다.

권위는 설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문화는 보여줌으로만 바뀐다.
그런 현실적 통찰이 담겨 있었다.

다음 댓글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술잔의 높낮이, 얼굴을 돌려 마시는 동작, 손으로 가리는 버릇…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유교적 예절과 근대 권위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설명이었다.

'밑잔을 비우고 따라라'는 관습이
자발적 예의에서 타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는 지적도 인상 깊었다.

마지막 댓글은 이렇게 정리했다.
"왜 생겼는지는 모르겠고,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예의라는 점이다."

예절은 무례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기준이 생기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따르며 자신을 방어한다.
그래서 어떤 구조보다 예절은 끈질기게 남는다.

모두가 안다. 이 예절은 오래전에 낡았다.

의미는 흐려졌고, 강요는 일상이 되었으며, 순응은 숨 쉬듯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 안에는 '눈치'라는, 소리 없는 공감이 있다.
끊기면 어색해질지도 모를 관계의 끈이 있다.

시집살이, 군대, 선후배 문화.
낯익은 위계들이 있다.

불편한 예절은 술자리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오랫동안 비슷한 것들이 이어져 왔다.

며느리는 새벽에 일어났고,
군기의 무게는 계급보다 무거웠으며,
선배는 배려받고 존중받아야 했다.

이 모든 문화의 공통점은 하나다.
개인보다 위계가 먼저였던 시절의 흔적.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익숙한 희생과 침묵을 배웠다.

이탈은 무례였고, 변화는 불경이었으며, 질문은 반항이었다.
위계는 견고했고, 침묵은 길었다.

어떤 문화는 여전히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위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며느리는 명절에 여행을 떠나고, 군대는 '가혹행위'라는 이름으로 다시 읽히며, 선후배 문화는 술잔보다 카톡 말투로 이어진다.

이제는, 선배가 먼저 물을 따르고, 신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서열보다 배려가 먼저 움직이는 순간,
예절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언어로 조용히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런 문화가 유독 한국, 중국, 일본처럼
동양권에서 두드러졌을까.

첫째는, 유교적 질서 때문이다.

'효', '충', '례'는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감정의 무기였다.
공경은 복종으로, 존중은 위계로 번역되었다.

둘째는, 자원 부족 사회의 생존 전략 때문이다.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튀는 자보다 맞추는 자가 필요했다.
이질성은 위험이었고, 동조는 생존이었다.

셋째는, 근대화의 방식 때문이다.

서구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통해 개인주의를 세웠지만,
동양은 산업화와 국가주의를 위해 상명하복 구조를 강화했다.

학교, 군대, 가족, 회사.
모두가 '동원된 재료'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예절이라는 이름의 순응을 배웠다.

누군가는 여전히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미 따르지 않는다.
누군가는 눈치를 보고,
누군가는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처럼 조심히 질문을 던진다.

“왜 얼굴을 돌려 마셔야 하죠?”

나는 그 질문이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

한국은 오랫동안
공존을 위해 동조를 택해야 했던 사회였다.
지금은 공존을 위해 이견을 견디기 시작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술을 따르는 것이 예의였다.
이제는, 마시지 않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예의다.

우리는 지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로운 시대로 옮겨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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