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트럼프를 동경했다.
강인한 눈빛, 확신에 찬 언어, 대중을 휘어잡는 에너지. 기존 정치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모습들.
그를 보며 “이 사람은 다르다”고 믿었다.
정치인이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끌림을 느꼈다.
계산보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진짜를 말하는 사람.
나는 그런 태도에 오랫동안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에게 관심이 크다.
다만, 재선 이후의 행보를 지켜보며 예전처럼 동경하거나 존경하긴 어렵게 됐다.
권력은 또 다른 권력을 낳고, ‘진실를 말하던 사람’이 점점 ‘힘으로 관철하려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감정은 혼란으로 이어졌다.
지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나는 비슷한 감정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윤석열.
기존 정치의 언어에 물들지 않은 사람.
정직, 정의, 법치.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고 거칠었지만, 그래서 믿음이 갔다.
나의 가족은 전통적인 보수였다.
교직에서 은퇴한 부모님, 산부인과 전문의 형, 그리고 나.
우리는 윤석열에게 기대를 걸었다.
우리는 변화를 원했던, 조용한 보수였다.
그러나 그 믿음은 대통령 당선 후 얼마 지나지않아 실시한 의료개혁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의료 현장을 무시한 일방통행, 전문성 없는 메시지.
그가 선택한 언어는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었고, 대책이 아닌 여론전이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누구보다 격렬히 분노했고, 더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됐다.
배신이라는 단어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믿은 사람이 사람을 헤쳤다"는 감각이다.
나는 정치 전반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
왜 우리는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고, 그 기대는 늘 절망으로 돌아오는가?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두 사람이 스스로 몸을 불태웠다는 뉴스를 들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그저 말문이 막혔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참사다.
어떤 변명도, 구호도, 그 책임을 대신해줄 수 없다.
한동안 뉴스를 껐다.
정치 혐오에 가까웠다.
그들은 여론을 따라 말을 바꾸고, 더 큰 소리를 내는 쪽이 정의가 되며, 철학보다 생존이 앞선다.
그 모든 풍경이 피로했고, 역겨웠다. (아직도 진행중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정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에 인생을 건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진짜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다시 누군가를 믿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 판단에 나 자신도 걸 수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 앞에, 일단은 머물기로 했다.
이제는 사람보다 기준을, 누가 옳은가보다,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려 한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진실, 책임, 인간을 지키는 마음..
모두 맞는 말이지만, 누군가를 그 기준에 맞춰 지지한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사실은, 아직도 헷갈린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누구를 지지한다고 말하기엔, 내가 걸 수 있는 책임이 너무 작고, 감당할 수 있는 후회조차 아직 두렵다.
그래서 지금은 이 멈칫거림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쉽게 믿지 않기 위해, 쉽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기준에 나조차 걸리지 못한다면,
어설픈 응원도, 충성도 시작하지 않겠다.
상처받고 실망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건 결국, 나도 그 책임 안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란다.
다시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그 사람이 다시 트럼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누가 옳은가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사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