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들지 않는 용기

by 노경문

트럼프가 정치판에 등장한 뒤, 쭉 그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많은 비판과 논란이 있었지만, 그와 언론 사이의 밀당은 흥미로웠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한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도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그리고 트럼프는 그것을 정면으로 공격한 인물이었다.

언론은 본질적으로 쉽게 신뢰하긴 어렵다.
그들이 다루는 사실은 대부분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에는 클릭 수, 광고주,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치열한 경쟁 구조가 작용한다.
기자든 유튜버든, 더 자극적이고 더 확신에 찬 콘텐츠를 만들지 않으면 눈에 띄기 어렵다.

중립은 조회수가 낮고, 합리는 공유되지 않으며, 냉정한 분석은 알고리즘에서 밀려난다.
지금의 미디어는 점점 더 선택적 진실과 극단의 언어를 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의 유튜브 환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팩트체크’와 ‘시민의 편’을 자처하는 유튜버들도 결국,
생존을 조회수에 의존한다.

사안의 복잡함보다 자극적인 해석이 선택받고,
타인을 설득하기보다 진영을 결집시키는 콘텐츠가 퍼져나간다.

“다 밝혀졌습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이거 보면 끝나요.”
이런 종교적 확신에 가까운 문장들이야말로 알고리즘이 가장 좋아한다.

콘텐츠의 진실 여부보다 클릭과 체류 시간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점에서 유튜버도 언론처럼 진실의 편이라기보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야기의 편에 설 뿐이다.

그들은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시장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디지털 생존자들이다.

2008년 대한민국의 광우병 촛불집회는 단적인 사례였다.
한 방송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강하게 제기했고,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일부 보도는 과장과 왜곡으로 판단되었고,
언론이 진실이 아닌 프레임을 기획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심었다.

그렇다고 트럼프를 옹호할 수만은 없다.
그는 언론의 이중성을 드러냈지만, 정작 자신에게 불편한 언론은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편만 품었다.

비판적인 매체들은 전용기 탑승에서 제외됐고,
백악관 브리핑은 점차 홍보성 질문으로 채워졌다.

질문은 검증보다 칭송에 가까웠고,
기자는 감시자가 아닌 무대 위 배우처럼 보였다.

이런 방식은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는 때로 제도의 견제를 피하고, 여론을 압박하며, 언론을 적으로 규정했다.
시민의 정보 선택권을 넓히기보다는, 편가르기를 통해 해석의 폭을 좁혔다.

비판했던 언론의 편향성을, 반대 방향으로 되풀이한 셈이다.

그는 언론과 권력의 구조를 흔들었고,
그 파열 속에서 숨겨져 있던 본질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균열이 또 다른 폐쇄적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역시 우려스럽다.

언론을 억압하는 권력의 위험은 더 노골적으로도 드러난다.
2018년 사우디에서 벌어진 언론인 살인사건(자말 까슈끄지).
국가는 감당하지 못할 비판을 폭력으로 지웠다.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면, 감시도 질문도 멈춘다.

이 양극단은 모두 경계해야 한다.
편향된 언론도, 억압하는 권력도, 진실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시민이 어느 한쪽의 ‘편’에 섰다고 믿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진실은 확신의 언어로 포장되고, 의심은 배신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비판이 사라지고, 편만 남는다.

시민은 ‘편’이 되어선 안 된다.
정보의 최종 소비자가 아닌, 최종 분별자여야 한다.

분별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기사 한 줄에도 반응하는 내 감정을 따라가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이 나를 흔들었는지,
왜 그 뉴스에 분노하거나 통쾌함을 느꼈는지,
그 흐름을 되짚어보는 것.
그게 바로, ‘감정을 타임라인으로 구성해보는’ 시민의 자기 객관화다.

처음엔 단순한 거부감이었다.
조롱조의 제목, 과한 확신, 편가르기.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 감정은 쌓여 있던 나의 경험, 억울함, 욕망과 맞닿아 있다.

나는 정보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정보가 내 감정을 대변해준 것에 안도했던 것이다.

진실은 확신 속에 있지 않고, 유보 속에 숨어 있다.
우리를 선동하는 건 팩트가 아니라, 감정의 구조다.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되묻는 사람만이,
시민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다.

진실이 숨을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다면,
그건 누구에게도 편하지 않은 자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이 시대, 시민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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