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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Nov 24. 2019

이사

집을 옮긴다는 것에 대하여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나서도 일주일.

아무런 글도 올리지 못한 것은 그 일주일이 치열하게 바빴기 때문이다. 회사 일도 꼬일 만큼 꼬여 있었고, 그 가운데 이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했기에 은행, 부동산과 계속 전화를 해야만 했다. 국가 지원금으로 이사를 한다는 건 저렴한 이율로 대출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서류 작업이 많다는 단점도 있었다.


오늘 드디어 그 과정들이 종료되었고, 5년 넘게 머물렀던 집에서 지금 집으로 왔다. 그 기념으로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지금 집까지 오게 된 일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


서울에 올라와 내게 '집'이란 부유하는 내가 잠깐 머무르는 곳이 되었다.  수 있는 공간이지만, 언젠가는 떠날 것을 전제로 머물렀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허세만 가득하여 처음 올라온 서울에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학교의 기숙사였다. 넓은 집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지만, 그 큰 건물에서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방 한 칸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니다. 사실 내가 허락된 것은 방 한 칸의 절반뿐이었다.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신발장과 옷장 반 칸.


게다가 나머지 반 칸에는 나와 같은 처지인 룸메이트가 함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에 살아서 익숙하다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마찰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만큼 나는 경험이 있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공동생활에 익숙지 못했던 탓이다.


멋모르는 철부지였던 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잘하지 못했고, 함께 사는 룸메이트와 마찰이 잦았다. 주로 청소와 불을 켜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깔끔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 눈에는 충분히 깨끗한 이 공간이 그녀에게는 왜 그리도 더러운 공간으로 보였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알았다고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수업 시작도 끝도 다른 대학생 두 명이 함께 살다 보니 취침 시간도 기상 시간도 달랐다. 그러나 불은 하나였다. 누군가 불을 켜면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서로에게 예민해졌다. 한 달여 정도 함께 살았을 때, 누군가 자고 있으면 미등을 켜거나 휴대전화 전등을 켜기로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옆의 그녀는 안대를 썼다. 미등마저도 그녀의 공간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리는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며 살았다.


3년 6개월 동안 총 다섯 명의 룸메이트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딱 1년, 불편함을 느꼈다. 나머지 2년은 미안함을 느끼는 둥 마는 둥 살았다. 그중 한 명은 이미 좋은 친구였었고, 다른 한 명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세 명은 다시 연락하지 않고, 연락할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기간은 내게,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기에는 참 어린 인간이란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대학 졸업과 맞물려 취업이 결정되었다.

아뿔싸! 기숙사 연장 신청을 하지 않은 나는 집이 필요했다. 아니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다. 친구와 함께 방을 구하려고 부동산에 연락해보았다. 그 돈으로 무슨 투룸을 구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친구와의 동거는 시작도 전에 좌절되었다. 퇴거까지 1주일, 답이 없었다.


서울엔 외갓집과 친척집이 있었다.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외갓집은 당진으로 귀농을 한 뒤여서 집에 친척들이 오고 갈 뿐 상주하진 않았다. 모아둔 돈이 500만 원도 없었던 그때, 취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답이 없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밖에는. (고모들과 함께 사느니 취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증금이 될 돈만 모이면 그곳을 나오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녹록지 않았다. 그곳에서 두 번의 퇴사를 했고, 여기를 나가서 집을 내 손으로 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를 살아가면 갈수록 실감했다. 오히려 내 입에서 이곳을 나가겠다는 말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불평은 많이 했다.


외갓집은 내년에 서른인 나보다 훠월씬 나이가 많은 집이었다. 엄마의 말로는, 예전에는 110v가 들어왔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겨울이면 메주를 띄우곤 했었고, 그 냄새가 벽지에 꾸덕꾸덕 남아 있었다. 문과 문틀은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옥색이었고, 주말에 집을 비우면 녹물이 나오기 일쑤였다.

매일같이 새 집이 지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런 집을 부러워했다. 오래된 이 집이 부서지면 아빠를 불러, 수리공 아저씨를 불러 수리하면서 언제까지 내가 이곳을 지켜야 할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 수도 배관이 터져서 난리를 벌였다.


오래된 집에 대한 짜증 때문인지, 새로운 집을 구하러 다닐 때 새로 지어진 집으로 가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리모델링을 새로 한 집이나 누가 살았던 집을 보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어찌하다 보니 신축 원룸이 내가 찾던 조건과 가장 가까워 이곳으로 결정하였다.


짐이 다 빠진 집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을 불러 수리하면서 고쳐가며 내 손을 탄 집이지만, 나도 그 집의 손을 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플 때 혼자 울 수 있는 동굴이 되어주기도 했고, 기쁠 때 친구들과 파티를 할 수 있는 아지트가 되어주고도 했다. 내가 백수일 때건, 직장인일 때건 내가 마음 편히 누워있게 해주었다. 그때는 그 행복을 모르고 늘 나가고만 싶어 했는데, 나오려고 보니 내가 그 집의 보호를 받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새집에서의 첫날밤이다. 아직은 서로의 손을 타지 않은 집과 나는 지금 조금 어색한 사이다. 하지만 조금씩 서로의 손을 타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이전 집처럼 나의 아지트이자 동굴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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