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erKS Apr 02. 2020

마지막일지도 몰라

소중한 일상을 보낸 다낭의 단상


스무 살에 처음 만난, 10여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올해 남편과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함께했던 시간만큼 함께했던 일들도 많았다. 수업도 같이 듣고, 훌쩍 함께 떠나기도 했었다. 이전 글에 있는 이스탄불 여행(!클릭!)도 이 친구와 함께였다. 근래 몇 해를 다른 이와 함께 보내와서 2019년은 혼자 여행을 떠나자 마음먹었는데,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둘이 여행을 간다면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겠는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친구에게 휴가 계획을 물었다. 다행히 아직 계획이 없다 하여 냉큼 친구의 여름휴가를 선점했다. 내 업무 일정 때문에 9월 중순이 지나 떠나게 되었지만 둘만의 여름휴가(?)는 그렇게 계획되었다. 우리의 여행지가 다낭으로 선정된 것은 찾던 조건들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친구는 휴양 테마의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우리 둘 다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선정하고 싶어 했다. 거기에 조건들을 붙여 선택받은 곳이 바로 다낭이었다. 







우리의 다낭 여행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하자면 이것 같다. 화려하지 않은 풍경을 보며 앉아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며 별일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가 말이다.


그전까지 업무가 바쁜 탓도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업무 해결을 위해 메신저를 내내 붙들고 있었다. 몇 달 전에 일정을 보고 미리 잡아둔 것이었으나, 회사일이 거의 매번 그렇듯이 일정은 계속 어그러져서 휴가 내기 전날까지 과도한 업무를 수행하고 온 길이었다. 그리고 일상에는 집안일이 있다. 내가 밤 9시에 집에 오든, 10시에 집에 오든 빨래는 쌓여만 갔고 먼지도 늘어만 갔다. 주말에 잠을 좀 자고 난 다음에는 빨래부터 청소까지 일주일을 묵혀둔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깨끗해진 집에 누워 있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반나절이었다. 내가 돌아다니는 발걸음마다 다시 더러워졌다.


그런데 여행에서는 매일 하우스키핑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무렇게나 해두어도 이불을 각 잡아 정리해주었다. 방은 일정 수준의 깨끗함을 유지했다. 누군가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게 여행이라서 좋다. 다낭에서의 여행은 돈을 아끼지 않고 그런 호사를 펑펑 누리었다.




 

휴양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의 일상이 너무 정신없었다 보니 휴양의 즐거움을 누렸다. 친구가 볼 때는 그래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뛰어놀고 싶은 망아지 같다고 했으나, 내 입장에서는 충분한 휴식을 누리고 있던 중이었다. 







일단, 술을 먹는 이유가 부정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님은 더없는 행복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원래도 맥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때는 일을 잊으려고 맥주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처리할 일은 너무 많았고 매번 남은 일이 있었다. 그러면 밥을 먹지 않아도 체한 듯 속이 더부룩했고 관성으로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면 그 고민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마시는 맥주는 좋은 기분보단 소화제 같은 역할만 했다.



다낭에 와서는 분위기에 맞춰, 마시고 싶으니까 맥주를 마셨다. 밤이 오기 전 적당한 가게를 찾아 아주 천천히 맥주를 고를 여유도 있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나온 것도 맥주 탓만은 아닐 것이다. 소화해내야 할 일상이 아니라 즐길 일상을 누리고 있었기에 행복한 얼굴이 그려졌을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 맥주 앞이라 그렇다고 했지만.



두 번째로,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보내서 호사를 누렸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했다기보다 가만히 있다가 찍은 사진이 많은 여행지였다. 두어 시간 맥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찍은 사진, 한 시간여를 물속에서 놀다가 찍은 사진, 튜브를 타고 하늘을 올려다본 사진, 길을 걷다가 찍은 사진. 





어딘가를 마구 돌아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사진을 맹렬히 찍은 것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이번 사진들은 여유가 묻어나는 사진이었다. 그때 누린 일상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친구가 말했다.

"네가 여기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 난 그게 왜 이리 슬프니?"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열심히 살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던 것 같다. 보통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하는 나였는데 그때만큼은 그것이 좋을 만큼 피곤했던 것이다. 그래서 좀 지루하다고는 느꼈지만 휴양을 맘껏 누린 것 같다.





분명 잘 먹고 잘 쉰 데다가 만족스러웠는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 시간 그곳은 새벽 5시였다. 휴대전화를 하면서 친구의 기상을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무슨 용기가 들었는지, 숙소 앞바다에 가보겠다는 마음이 들어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겨놓고 로비로 갔다. 햇살에 가려 비가 오는지 몰랐는데,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지러 가면 곤히 잠든 친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로비에 있던 직원에게 우산을 빌릴 수 있냐고 물으니, 웬 항아리에서 우비를 하나 꺼내 주었다. 후드티처럼 생긴 우비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갔다.


길 건너의 수영장에서는 약한 락스 냄새가 풍기었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그곳도 새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여행자로 변신할 준비를 하듯. 빗속을 뚫고 달리기를 하는 중년의 남성들이 보였다. 그 정도로 패기 있진 않았던 나는 그저 비를 맞고 있었다. 파도로 가서 파도에 발을 담가보기도 했다. 동남아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비를 흠뻑 온몸으로 맞는 것이었는데 절반 정도의 성공을 이루어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다. 늘 나 때문에 출근 아닌 출근 시간에 일어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방에 들어와서 비만 좀 털어내고 호텔에서 진행하는 아침 요가를 듣기로 했다. 그 정도 여유 시간이 있으면 친구도 맘껏 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설핏 눈을 뜬 친구에게 요가에 도전하고 오마, 하며 요가 클래스가 열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플라잉 도구가 매달려 있어 어마무시한 요가 고수일 듯하지만 이때 요가를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나는 맨손으로 하는 반에 들어갔다. 몇 명의 한국인이 더 왔고 수업은 인도어로 진행된 듯했지만, 눈치껏 숨쉬기와 운동을 알아들었다. 새삼 이렇게나 몸의 밸런스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고, 강사님은 나의 몸상태에 여러 모로 깜짝 놀란 듯하였다. 나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몸에 놀랐는데, 강사님은 어떠하였는가.


홀로 바빴던 아침 시간을 보내고 친구와 체력을 맞추어 하루를 보냈다. 

그럼에도 친구는 내가 너무 활기차다고 하였다.





마지막일 요소가 많은 여행이었다. 휴양 여행은 피하는 편이니, 마지막 휴양 여행일 수도 있다. 다음에도 같이 가자 하였으나 새 가족이 생긴 친구와 나의 사정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둘만 떠나는 게 마지막인 여행일 수도 있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는 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내 일상을 잃어가며 사는 건 싫으니까. 그것만은 제발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다낭은 휴양으로도 유명하지만 근교의 여행지로도 유명한 여행지다.

나에게 다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 휴식의 소중함을 알려준 도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하는 여행의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