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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May 20. 2020

어디로 가야 하죠?

모험의 도시 서울에 대한 단상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느낀 감정이, 주인공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였다. 특히 1화의 내용이 그랬다. 길을 물으면 내가 서울 사람이 아닌 게 티가 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지하철역 출구는 왜 이리도 많은지 매번 헤맸다. 


학과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서울로 온 날이었다. 그날은 그전과 다른 출구도 나왔고, 내가 매번 외우던 길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터치폰조차도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길을 찾으려면 누군가에게 물어야만 했다. 그 일을 쓰려니 부끄러워 죽겠는데, 그때는 학교 이름을 물어보는 게 더 싫었던 내가 존재했었다.

"OO대학교 병원이 어디예요?"

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나름 머리를 써보겠다고 학교 부설 병원을 이야기했는데 왜 저런 표정이지 했다. 그 사람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사람을 붙잡은 곳 바로 앞에는 학교 병원이 있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곳을 묻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지금 이렇게 묻는다면, 특정 종교인이 아닐까 싶어 의심스럽게 쳐다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긴 했지만.





서울은 내게 이정표를 가르쳐주지 않는 도시 같았다. 서울이라는 곳에 들어오기도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하나를 찾으면 다른 하나가 나오는 모험 같았다. 하지만 모험에 적절한 길은 없었다. 모든 곳이 길이 될 수 있었고 내가 어디를 밟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펼쳐졌다. 그 생활을 지금 10년 가까이하고 있다. 그 정도면 편안하게 걸을 만하건만, 내게 박인 굳은살은 또 다른 상처에 뚫렸다.


아마 이런 풍경으로 서울이 기억되는 건, 학생이 끝나고 나서의 생활을 서울에서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내게 직장과 같다. 사회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서울에서는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다. 서울에는 너무 바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아서, 잠을 많이 자면 뒤처질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회 초년생 때는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6시가 되면 일어날 수 있는 신기한 능력도 잠시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이나 청계천을 걷다 보면, 밤이 되어도 건물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서울에 올라온 처음에는 그 불빛이 참 예뻤다. 그런데 노동자의 자리로 오고 나니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집에 가는데!'라는 걱정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잠들지 않는 도시 같다. 그 안에서 생존(survive)해 내려면 더욱 노력해야지 저절로 마음먹게 되는 도시다. 그래서 가끔은 여기에 나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 한다고 다 생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가끔 나는 도태되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지금은 불빛이 좀 무섭다. 그 안에 속하지 못해서 서럽기도 하다.





이렇게 쓰니 서울이 매서운 곳이다 이야기하는 것 같다. 모험을 해야 하는 만큼 서울은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빠른 트렌드가 나오는 곳인 만큼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많았다. 지치는 날에는 그런 곳엘 갔었다. 또 기회도 많았다. 내가 원하는 업계의 회사가 있었고, 내게 배움을 준 학교가 있었고, 여러 미술관, 공연장 등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갖추어진 도시에서 10여 년을 살았다는 건 많은 기회를 누렸다는 것과 같다.


서울에 살지 않았다면, (전공의 덕도 있지만) 그 많은 무대 공연을 볼 기회는 특히나 없었을 것이다. 소극장이라는 게 지방에는 더욱 적기에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서울에 살면 다양한 취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연극 자체를 서울 올라오고 나서 처음 봤다. 뮤지컬도 그랬다. 여기서 살아서 향유할 수 있던 문화였다. 


그렇다고 서울에만 살아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다. 아직 일할 의욕이 넘치고, 하고 싶은 일이 서울(경기를 포함한 서울 권역)에 있기에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욕심이 조금 더 놓아지고 조금 더 편안한 일상을 잡고 싶다면 거주지를 옮길 생각도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서울은 내게 많은 기쁨도 주었다. 그만큼 힘든 일도 많이 주었다. 그래서 애증의 도시다. 재미있기도 하고, 많은 친구들은 만들어준 도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만은 알려주지 않는 도시기도 하다. 예쁘장하지만 웃음만 띄울 뿐 말이 없는 매력적인 친구 같다고나 할까. 서울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더 이어지길 지금은 바란다.


얄미로운 서울이여, 조금만 더 함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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