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단상
외지인이 대전을 떠올린다면, 아마 이 다리를 떠올릴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 세대라면 1994년 엑스포의 상징이다. 조금 더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노란 얼굴의 꿈돌이를 기억할 것이다. 대전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전이란, 1994년 엑스포의 영광으로만 기억되는 도시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분명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대전에서 왔습니다."
"뭐라고? 대전...? 대구...? 그럼 너도 사투리 쓰니? 오빠야~ 해봐."
라고 할 정도로 대전의 이미지는 아주아주 흐릿했다. 대구와 헷갈려하며 경상도 사투리를 시키기도 했다. 그게 아니면 사회탐구 한국지리 영역을 막 공부하고 온 사람들에게 대전이란 교통의 요지 정도의 인상만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집에 내려가려면 4시간을 걸리지 않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대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나는 대전에서 내리 15년을 살았다. 기억의 시작이었던 5살 때부터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인 19살까지, 나는 전학 한 번 가지 않고 대전이라는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대전이 고향은 아니다. 출생신고를 한 곳은 창원이고, 나는 대전에 오기 전까지 창원, 대구, 경산 등 경상도에 살았다. 엄연히 말해서 대전이 고향은 아닌 셈이었다.
사실 고향이 어딘지 굳이 생각해본 일은 없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나왔고 그 안에서 쭉 있는 동안 내게 '대전'에 언제 왔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대전이 어떤 도시인지 서로 공유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대학에 오니 '고향'이 어딘지, '어디'에서 올라왔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었던 것뿐인데, 그때는 '고향'과 '올라온 지역'이 다른 나는 이걸 어디서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다. 그런데 고향인 창원은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한 살부터 4살 배기까지만 살았으니 기억은 전무했다. 그래서 고향이라고 설명하기도 멋쩍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대전이 고향이고 나고 자랐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대전이 고향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의 시작은 대전에서부터였다. 타인에게는 모호한 이미지만 갖고 있는 곳이었지만, 나에게 대전은 가장 오랜 기억들의 공간이었다.
타인들이 대전에 대해 특정 이미지를 갖게 된 건 2010년대 초반이었다.
대학생의 첫 방학에는 으레 여행을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유럽 배낭여행이 대두된 건 그보다 후였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국내 철도여행, 일명 '내일로' 티켓을 끊고 국내 일주를 하는 게 필수 코스였다.
교통의 요지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를 환승할 수 있는 주요 도시였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은 아니더라도 모두가 한 번쯤은 들러 가는 도시가 되었다. 그에 덩달아 유명세를 탄 것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빵이었다.
사실 성심당은 내일로 여행으로 페이스북 등의 SNS에 알려지기 전부터 유명했다. 10대 학창 시절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우리는 시내(은행동, 으느정이)로 향했다. 성심당 본점은 그곳에 있었고, 시식코너가 많은 그곳에서 우리는 뒤돌아서면 허기진 10대의 배를 채우곤 했다.
이미 성심당의 빵이 맛있는 건 정설이었다. 내일로를 통해 유명해진 빵은 '튀김 소보로'였다. 대전역 안에 성심당 분점이 들어왔고, 기차를 타기 직전 콧속으로 들어오는 기름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튀김처럼 갓 기름에서 나온 튀김 소보로는 성심당의 그 어떤 빵보다 유명세를 탔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도 의아했다.
'그런 빵이 있었나?'
그리고 다시 의아해졌다.
'대전 사람이면 너는 튀김 소보로 먹어봤겠다! 맛이 어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먹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전에 내려갔던 그 다음번, 나는 친구와 함께 튀김 소보로를 사 먹어보았다. 친구도 의아해했다. 이미 유명했는데, 10여 년을 넘게 살면서 몰랐던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사실 내겐 특별한 맛이 아니었다. 성심당의 빵 중 다른 게 더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 대전은 '튀김 소보로'의 도시가 되었다. 평생 없던 내 도시의 이미지는 빵이 되었다. 튀김 소보로가 익어가는 도시 대전의 사람이 되었다. 한 번도 이미지를 생각해본 적 없던 나의 도시 대전이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게 대전은 꽃 피는 고향이다.
내게 대전은 많은 기억이 저장된 고향이다.
언제든 내려가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고향이다.
내가 10년 전까지 살던 집 앞 주차장에는 3월이면 흐드러질 듯 무거울 듯 벚꽃이 만개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떨어지는 꽃잎은 빛이 산란되어 반짝였고 빛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듯 느껴졌다.
내게는 이런 도시 대전이 누군가에게는 엑스포의 도시였고, 꿈돌이의 도시였고, 튀김 소보로의 도시였다. 도시는 그곳을 지나가는지, 살아가는지에 따라 모두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내가 연재할 도시 컬렉션은 내가 살아왔던, 그리고 내가 들렀던 곳들이 내게 지닌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