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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Dec 08.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AB형 여자의 화법




와이프와 나는 기사를 볼 때, 주로 보는 것은 사회면의 사건사고다. 우리는 공포와 미스터리 추리물을 좋아하고 그것의 자극을 즐긴다. 누군가의 절망스럽고 안타까운 사건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종종 와이프와의 대화 소재 거리가 되기도 한다.) 수많은 국민의 공분을 산 최근 사건들을 보면, 그 중심에는 사이코패스와 더불어 가스라이팅이 있다. 그날도 육퇴를 하고 와이프와 간소하게 차린 안주에 맥주 한잔 할 때였다. 앞에 나오는 TV 화면에는 어김없이 사건사고를 다루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아마도 '그것이 알고 싶다' 또는 '궁금한 이야기Y' 였을 것이다. 아니면,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였는지도.) 


술 한잔 들어가니, 와이프가 말했다.

"내하고 결혼한 게 다행인 줄 알그레이."

"세상에 내 같은 여자 없데이."


우리 와이프가 자신을 두고 즐겨하는 말이다. 특히나, 화면 속에서 여자 사이코패스가 나와 남편 보험살인을 한다거나 하는 사건이 나오면,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말이다. 이 외에도 "오빠는 못생겼다." 거나, "이거는 자기가 잘하니까, 자기가 해라."라는 말도 즐겨한다. 자신은 인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성에 문제가 없는 자기가 참고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곤 한다. 이런 것도 가스라이팅일까. 




사실 가스라이팅의 정의대로라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가스라이팅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특히나 한국의 어머니들 대부분은 자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로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욕을 들으며, 아버지는 죽일 놈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어머니 본인의 삶이 얼마나 억울했던지 매일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버지에 대한 의심과 욕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던 것 같다. 아버지를 통해 직접 듣거나 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수많은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 주셨던 분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세계관이 옳은 줄 알았고, 하는 말씀이 다 옳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업군인 생활로(직업군인을 선택한 것도 어머니의 의견 덕분이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조금씩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영역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역이 커질수록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집안에 갇혀있다가 밖에 나가 흥분한 개처럼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일탈을 누리며 지냈다.(이때 사건사고가 안 일어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낀다.) 뒤늦게 사춘기를 맞이했다. 그때 당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달에 100만 원씩 적금은 꼭 넣었다.(물론, 어머니 명의 통장으로 말이다.) 어느 날, 그 달에 술값이 많이 나와서 적금을 한 번 못 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전후 사정을 듣는 둥 마는 둥, 어머니는 나보고 "야이, 개새끼야."라고 하셨다. 그때의 순간 이후로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군대에 보낸 것을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직업군인 생활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하며 결혼의 순간도 맞이했다. 격렬한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었다. 힘들게 그 순간을 벗어나며,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집을 나오게 되었다. 어머니의 가스라이팅에서 드디어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내 가정을 꾸리며, 어머니의 요구는 더 이상 들어주지 않는다. 어머니의 가스라이팅이 지속된다면, 온전한 결혼 생활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게 어머니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도 사그라들었다.(물론,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했던 부분은 싫어한다.) 이렇게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는데, 이제는 와이프가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걸까. 와이프는 자신이 못하는 건 당당히 이야기하며, 이를 근거로 남에게 은근슬쩍 일을 넘겨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인다.


"세상에 나 같은 여자는 없데이."

"그래도, 오빠 없이는 살 수 없데이."


"오빠는 못생겼다."

"그래도, 사랑한데이."


이렇게 단서를 달면, 기분이 나쁘려다가도 풀린다. 자신 같은 여자 없다는 자랑으로 끝나거나, 못생겼다는 비난으로 말이 끝나면,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사실 "못생겼지만 사랑한다."는 것보다, 그냥 사실이 아닐지라도 "잘생겼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선호하긴 한다. 하지만 와이프는 솔직, 직언을 잘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가스라이팅인지 헷갈린다. 내가 정말 그렇게 못생긴 걸까.(사진이나 거울을 보면 객관적으로 잘생긴 것 같지는 않다. 거기다 탈모도 진행 중이라.) 이러한 것이 설령 잘못된 정보를 주입시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래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서 때문이다. 


"당신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라고 이야기하더라도,

"그래도, 나 역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라고 한다거나, 


"당신의 이러한 점은 정말 싫어."라고 이야기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생에도 당신을 만날 거야."


라고 한다면 어떨까.


범죄에 악용하기 위해 남을 조종하는 가스라이팅도 존재하지만, 이처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에둘러 가스라이팅 아닌 가스라이팅처럼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모두 그녀가 의도한 바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어쩌면, 나는 호구일지도.)


AB형 여자는 "교묘"하게 직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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