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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Jul 26. 2020

서울과 멀어지는 중입니다.

미국 시골에서 서울을 그리면서

서울에서 27년을 살았다. 서울은 아빠의 고향이고, 경기도가 고향인 엄마가 50년을 넘게 산 곳이다. 주민등록등본의 본적도 서울이니 그냥 서울사람이다. 직장 때문에 서울을 떠났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기를 낳으면서 서울은 이제 나의 고향이 되었다.


추석이나 설날이면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셨고, 외갓집도 아무리 차가 막혀도 2시간이면 도착했다. 기차는커녕 고속도로 휴게소도 한 번 들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명절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는 것을 너무 해보고 싶어 아빠를 졸라 경부고속도로 첫 번째 휴게소에 들러 소시지를 사 먹고 집에 간 적도 있다. 서울이 고향인 나에게 명절은 서울이 텅텅 비는 아주 고마운 시간이었다. 일 년 중 딱 두 번. 북적이지 않는 서울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명절 당일 오후는 그야말로 서울에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산책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오면서 혼자 살아본 적도 없었고,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대학교도 지하철로 20분 거리에 있고, 입사 첫해 과천으로 출퇴근을 하던 시절에도 지하철을 타면 그냥 갈 수 있었다. 어릴 적 꽉 막히는 간선도로를 타고 아빠가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세상 어디든 지하철과 버스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서울은 나에게 그냥 집 같은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 미어터지는 지하철을 피하려고 이른 시간에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곳. 학창시절 시험이 끝나면 대학로, 명동으로 친구들과 놀러 가던 곳. (특히 민들레 영토?!) 대학교 시절 새벽까지 술 먹고 통금시간을 간신히 맞춰 집으로 돌아가던 곳. 매캐한 매연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일상이 너무나 당연한 그런 곳.


27년을 서울에서 살다 처음 이사를 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하철은 당연히 없고, 버스가 다니는 곳도 꽤 번화한 곳만 다닐 수 있다는 것. 그 버스도 배차 간격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나이트 버스(N)도 없다는 것. 서울이 아닌 중소도시는 그런 곳이었다. 면허를 따지 않고 살겠다는 나의 다짐은 무참히 무너져버렸다.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면허를 땄고, 운전을 시작했다.


중소도시의 삶은 타인과 어깨를 부딪치거나 만원 지하철에서처럼 타인과 불필요한 접촉이 필요 없는 삶이었다. 어디를 가나 거리는 한산했고, 버스도 특별한 시간이 아니면 앉아서 탈 수 있었다. KTX 어플을 처음 깔았고,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기 위해 분투를 벌였다. (KTX역이 있는 도시이니 꽤 번화한 도시이다) 사는 곳에서 다른 지방 중소도시를 가기 위해서는 그냥 서울을 거쳐 가는 편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중소도시와 중소도시 간 이동은 차가 아니면 거의 방도가 없었다. 시외버스를 가끔 이용해 보았는데 시간이 넉넉한 여행이면 모를까 시간에 쫓기는 출장은 턱도 없었다.


그런 삶을 살다가 미국으로 왔다. 그것도 미국 시골. 여기도 국제공항이 있는 도시이니 미국에서 작지 않은, 시골은 아닌 도시이다. 미국은 세 걸음 걷는 거리는 차가 빠르다고 할 정도로 대로에는 건널목이 없다. 사람이 걸어서 다닌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버스는 원래 소문이 흉흉해서 탈 생각도 안 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로는 교통수단의 선택지에 고려대상이 아니다.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한적한 동네다. 심지어 차도 주차난에 시달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주차 공간도 얼마나 넓은지 미니밴을 몰고 다니는 우리도 삐뚜름하게 주차할 수 있을 정도다. 뉴욕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뉴욕의 교통난과 지하철에 대해 성토할 때면 ‘아, 내가 미국 시골에 살고 있구나’ 떠올리곤 한다.


그나마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한국의 거주지와 달리 미국은 건물도 다 낮다. 승강기를 타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차로 조금만 나가면 온통 호수, 숲, 과수원인 동네에서 살다 보니 온몸은 그냥 새카매지고 구두보다는 등산화를 더 많이 신고 다닌다. 중고 미니밴에 온갖 짐을 실어 주립공원으로 냅다 달려가면 트래킹이나 물놀이를 하고 차 트렁크에 돗자리를 펴고 세 가족이 간식을 먹는다.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면서, 우리 부부는 미국에서의 미니밴 생활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우리 가족 첫차로 대형 SUV를 계약했다. 면허를 딸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가 대형 SUV를 인생 첫차로 지르고 나니 정말 서울과 멀어졌다는 실감이 났다. 차 없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서울의 그 혼잡한 도로와 주차장은 점점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어간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서울을 떠난 지 7년이 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서울을 떠나고 결혼을 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까지 3~4년은 주말마다 서울로 가서 서울을 그리워하고 반쯤 발을 걸치고 있었다.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면서, 그리고 이역만리 먼 땅 미국에 오고 나서야 내가 정말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난 아직도  서울을 떠올리면 설렌다. 내가 사랑한 서울. 내 고향 서울. 이 세상 어디보다 가장 따뜻한 서울.


지금 나는 서울을 떠나 살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 가는 중이다. 그만큼 서울과 멀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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