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한쪽에 과자를 담아둔 상자가 있다. 절을 찾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둔 것이다. 과자가 담긴 상자라는 발신기는 수신자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과자 상자를 앞에 두고 과자를 가져가도 되는지 몰라 과자를 앞두고 망설이는 사람도 있고 머뭇거리다가 주변 사람이 하나둘 과자를 집기 시작하면 그제야 과자를 챙기는 사람도 있고 과자가 있는지조차 몰라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제각각의 반응을 보면 같은 과자 상자인데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어 닿는구나 하고 새삼 실감하게 된다.
과자도 글로벌 해져서 국적을 알 수 없는 과자도 꽤 많이 나온다. 한국 과자는 맛을 예상할 수 있으니 기호에 맞는 것을 집어 오면 되는데 외국 과자는 사정이 다르다. 맛을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맛인지 알기 위해서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어떤 향이 나는지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는지 같은 것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낯선 외국어는 글자가 적혀 있다고 해도 정보가 되어 닿지 않는다. 맛이 궁금하기는 하나 입에 맞지 않다고 해서 공짜로 가져온 것을 버릴 수 없는 노릇이라 처음 보는 과자는 늘 눈요기만 하게 된다.
비슷한 경험을 외국에 갔을 때도 자주 한다. 외국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현지 음식을 먹어볼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여 많은 여행객이 여행길에 오르기 전 미리 맛집을 검색해 두기도 하고 그 나라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음식 목록을 적어서 가기도 한다. 여행 계획 세우기도 일처럼 느껴져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에는 즉흥적으로 여행길에 오르고는 하는 나로서는 부지런한 여행객들의 맛집 투어가 경이로워 보일 때가 많다. 몇몇 여행지와 기록을 위한 도구만 준비해 두면 내 여행 준비는 끝나기 때문이다. 나의 여행은 기록이 80%를 차지하고 있어 먹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외국에 가서도 스타벅스에 앉아 카페라테에 빵을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모를 아쉬움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새로운 맛을 탐색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다고 해도 여정이 있으니 때로 편의점이나 마트에 들러 장을 봐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난감함을 느낀다. 영어 설명과 한국 음식의 포장지를 떠올리며 대략 맛을 짐작하여 이것저것 주워 담기는 하는데 1/3 정도는 맛만 보고 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검색하자면 그것도 일이라 입맛에 안 맞으면 버리는 쪽을 택하고 말게 된다.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와 여행 경비를 생각하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보면 맛 또한 일종의 규범 또는 편견인 것도 같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음식이 있다고 해도 내가 선호하는 맛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맛에 대한 감각이 긴 시간을 들여 몸에 익혀가는 하나의 습관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습관 중 가장 바꾸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맛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늘 사는 것만 사고 늘 먹는 것만 먹었다. 한 번 들인 습관은 참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세상이 좋아져서 세계 각국의 음식이 쏟아져 들어오고 예전에는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간편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내가 택하는 것은 몇몇에 한정되어 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음식과 맛이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맛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 모든 맛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취향이 없거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호오(好惡)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데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오히려 기호를 지우는 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보도 취사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고 한다면 네트워크 시대가 열리고 세계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감당하기 힘든 정보가 쏟아지는 것에 조바심과 압박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취향이 명함이 되기도 할 정도로 ‘자기 자신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니만큼 정보를 무조건 많이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세우고 필요한 정보와 그에 반하는 정보를 모아 설득력 있게 조합해 가는 연습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무미건조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축해가고 있을지.
이른 아침, 예상치 못한 손님 둘이 과자 상자 앞에 선 것을 보았다. 상자 앞에 선 두 녀석은 종류에 상관없이 과자를 마구 집어서는 정신없이 봉지를 뜯어댔다. 저렇게 거친 손길로 봉지를 뜯어 과자를 꺼낼 먹을 수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 두 녀석의 몸짓을 가만 지켜보았다. 과자의 단내에서 배어나는 유혹을 견딜 수 없었던지 둘은 봉지가 뜯기지 않는데도 필사적으로 과자 봉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소란스러움에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 사람 몫으로 내놓았으니 네 발 달린 고양이가 탐낼 것은 아니라는 소리의 매질 이 그들을 쫓아낸 것이었다.
고양이 두 마리에게 눈앞의 과자는 이름 없는 먹을 것에 불과했다. 어떤 맛인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먹는 것이 눈앞에 있다. 허기진 그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우리를 채워주는 것들에 있어 당신과 나는 허기진 고양이일까, 취향을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취향이라 알고 있었으나 실은 나도 모르는 편견에 길든 우매한 대중인 걸까. 다섯 종류의 과자 중 두 개를 집어온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질문한다. 이것을 왜 집어 왔을까, 어떤 맛이 내 손을 움직이게 했을까, 과자를 집은 마음에 먹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는 했던 걸까.